볼트 그리고 디즈니의 부활 디즈니 리뷰

볼트 그리고 디즈니의 부활
   -볼트 Bolt (2008)


기본적으로 애니메이션은 쿨미디어를 지향합니다. 왜곡되고 단순화된 묘사와 다양한 표현기법은 궁극적으로 수용자의 상상력을 자극하고 확장시키는데 이런 매체를 쿨미디어라고 합니다.

3D 애니메이션의 등장은 이런 쿨미디어의 성격을 전복시켰습니다. 기술의 도움을 받은 애니메이션은 사실성에 집착했고 그 가운데 실사의 배경과 고도의 테크놀러지를 결합시켜 하이퍼 리얼리티의 단계로 나아간 디즈니의 실험작 '다이너소어'가 나오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완벽하게 실제로 구현된 애니메이션의 세계, 즉 쿨미디어적 성격이 제거된 애니메이션은 시장에서 환영받지 못했습니다. 다이너소어는 수익을 간당간당하게 맞추었고 스퀘어가 만든 야심작 '파이널 판타지'는 회사의 운명을 바꿀 정도로 흥행에 실패했습니다. 한편으로는 네러티브에 사실주의를 입히자는 견해도 있었습니다. 드림웍스가 제작한 '스피릿'에서는 '말하는 동물'이라는 비현실을 제거하지만 동시에 날아든 것은 애니메이션으로서의 정체성에 대한 반문이었습니다. 영화는 쫄딱 망했습니다.

(실사영화의 대안으로 제작되었으나 실패한 3D 영화 파이널 판타지)

그러나 애니메이션 시장이 전체적으로 3D로 가면서 이들은 좀 더 영리해지기 시작합니다. 즉 절충주의 식으로 융합을 도구화하는 방안을 마련한 것입니다. 다시 말해 쿨미디어적인 뼈대를 유지한 채 필요한 부분에 한해서는 사실주의를 입히는 것이죠. 바다와 시드니를 무대로 한 '니모를 찾아서'는 이런 영리한 융합의 절정을 보여줍니다. 니모의 눈썹은 가짜지만 그 물고기가 살아숨쉬는 공간은 대단한 현실적인 무게감을 바탕으로 형성되어있습니다. 좀 더 특이한 경우로는 '슈렉'도 있습니다.  이 작품은 기존의 서사를 포스트 모던식으로 결합해 만든 비현실적인 애니메이션 세상속에서 현실을 모사해냅니다. 기술 중심의 리얼리즘은 슈렉에 와서 다소 흔들리기 시작합니다.

볼트는 이런 기술 중심의 리얼리즘의 세계를 다시 한번 비틀어 놓습니다. 영화는 자기가 슈퍼히어로라고 착각하는 강아지 볼트의 이야기입니다. 영화 초반 십분간 펼쳐지는 슈퍼 히어로시퀸스는 과거 디즈니 액션물의 액기스 수준입니다. 실사 영화에서는 불가능한 과감한 카메라 워크와 현란한 편집, 농축된 묘사는 그 자체로도 꽤 괜찮은 작품이 되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게 합니다. 아마도 디즈니가 살아있었더라면 영화의 거시적인 스토리보다는 앞부분의 슈퍼히어로 이야기에 더 큰 감흥을 받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영화에는 픽사의 프로듀서였고 이제는 디즈니와 픽사를 총괄하는 존 라세터의 색이 묻어있습니다. 이 영화는 디즈니가 픽사와 합치는 그 과도기적 진통을 모두 담고 있습니다. 애초에 아이디어를 내놓았던 크리스 샌더스-릴로앤스티치의 감독-는 자신의 에고를 인정해주지 않고 협력의 아이디어를 강조하는 라세터에게 반발해 디즈니에서 나가볐습니다. 영화의 스토리는 수백번 바뀌었고 그새에 계획되었던 라푼젤같은 작품들은 뒤로 밀렸으며 착한 유령들같이 폐기통에 처분된 아이디어도 있었습니다. 그런만큼 작품의 성격은 확고합니다. 이것이 디즈니가 나아갈 길이다라고 선포하는 것과 같다고 보여집니다. 영화에는 무수히 많은 고민의 흔적이 남겨져 있죠.

(초기 아이디어 '아메리칸 독')

영화는 내적인 리얼리즘을 추구합니다. 슈퍼히어로의 허상 속에 강아지 볼트는 미친 개가 됩니다. 흡사 투루먼쇼를 연상시키는 영화의 큰 줄기는 그러나 볼트가 정체성을 찾아가는데만 시간을 할애하지는 않습니다. 영화에서는 과거 존 라세터가 만든 걸작 '토이스토리'의 향이 느껴집니다. 단지 이 경우는 조금 더 쉽게 이야기를 풀어가는데, 소재의 차이입니다. 원본없는 복제이자 언젠가는 버림받는 '장난감 정체성'의 고민 속 진지함은 삼일밤낮으로 이야기해도 풀리지 않는 실타래지만 볼트에게는 그런 고민을 충분히 대체할 수 있는 현실이 남아있기 때문입니다.

먼저 티비쇼의 개로서 볼트는 대체가 가능한 복제에 지나지 않습니다. 영화속 프로듀서들은 볼트가 실종된 그 순간 바로 대체품을 구해 촬영을 계속합니다. 심지어 주인이자 같은 쇼에 출연하는 페니조차도 대체가능한 배우 중 하나일 뿐이죠. <여담인데 실제로 이 영화 제작중에도 그런 일이 일어났습니다. 마일리 사이러스가 맡은 페니역은 원래는 Chloe Moretz였다고 하는데요, 황당한 아이러니입니다. > 그러나 볼트는 여전히 원본으로서 존재할 수 있는데, 그 원본이 가진 아우라의 권위가 복귀되는 과정을 영화는 충실히 그려내고 있습니다.

볼트는 중반부를 지나면서 자신이 슈퍼 히어로가 아니라는 사실을 자각하기 시작합니다.  자신의 정체성은 광고판에 무수히 걸려있는 그 꾸면진 영웅의 이미지가 아니었던 거죠. 그 순간 볼트의 모험도 '과정'이 상실된 이상한 것이 됩니다. 극중 페니가 납치된 줄 알고(드라마속 상황) 그녀를 구하기 위해 시작했던 여행은 그것이 모두 드라마 속 상황이라는 것을 깨달은 그 순간부터 허구와 진실의 모호함에 서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서 볼트는 고민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그의 존재가 티비쇼의 주인공으로서만 가능한 것인지 아니면 자신을 원본으로 회복시켜줄 진짜를 찾아야 하는 것인지. 영화는 심오한 질문으로 깊은 울림을 던져놓습니다.

그에게 답을 주는 것은 극중 만나는 반미치광이 햄스터 '라이노'와 현실주의적인 고양이 '미튼스'입니다. 극중 버림받은 고양이 미튼스는 인간세상으로부터의 완전한 독립을 통해 볼트에게 자유를, 라이노는 그 길이 스스로 개척해 나가야 하는 것임을 설파하죠. 볼트가 그들과 함께 전국을 횡단하며 겪고 깨닫게 되는 것은 바로 그 최초의 목적이었던 페니입니다. 처음에는 페니를 구하기 위한 슈퍼파워를 되찾기 위해 시작된 모험은 이제 자신의 정체성을 찾기위한 내적 고민으로 심화됩니다. 그리고 마침내 볼트는 페니를 다시 만나 복제된 개의 이미지에서 벗어나 '진짜'가 됩니다. 페니가 볼트라는 '개'를 사랑하는게 아니라 '볼트'를 사랑하기 때문이고 바로 그 사랑이 유일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동시에 미튼스, 라이노와 함께 가족으로서 살아가는 과정은 페니가 가지는 한계를 연대를 통해 극복할 수 있음을 시사합니다. 이들은 티비쇼의 무한한 복제세상에서 탈출해 마침내 애정으로 뭉친 진짜 원본들이 된 겁니다. 영화가 말하고 싶은 건 바로 그것입니다. 과거 가족물의 양산으로 비판받아온 디즈니의 철학은 이런 식으로 발달해왔습니다. 이 작품이 바로 그 결과물이라고 자신있게 말할만 합니다.

이런 네러티브는 이전 작품들의 뚜렷한 구조를 지우기 시작합니다. 평작이었던 '로빈슨 가족'이후 불과 1년반만에 내놓은 작품 치고는 거의 완벽하게 성숙되었죠. 작품에는 악역도 없습니다. 단지 선택의 문제입니다. 무수한 복제의 세상에서 그 중 하나로 살 것인지 자신을 진짜 하나로 만들어줄 그 곳으로 나아갈 것인지 작품은 쿨미디어 속에 진짜 뜨거운 현실세계를 녹여냅니다. 어쩌면 3D영화들의 진통과 고민이 볼트에 와서 완성된 것인지도 모릅니다.  여튼 헐리우드에서 이런 영화를 만든다는 것은 도통 적지 않은 아이러니라 할만하군요. 그러나 이런 네러티브의 비약적 성장은 두고볼 만한 일이고 관객으로서는 반가운 소식입니다. 앞으로의 디즈니 영화들을 더 기대할 수 밖에 없을겁니다. 이런게 부활이 아니면 뭐가 부활이겠습니까.

다른 부분에 대해서 말하자면 액션감이 충분히 녹여져 있어 그냥 아무 생각없이 보기에도 꽤 재밌습니다. 배우들의 연기도 좋고 무엇보다도 개를 키워본 사람이라면 극의 후반부, 갑자기 눈가가 촉촉해지는 걸 막기가 힘들겁니다. 사소하지만 디테일한 묘사들이 즐겁습니다.

ps. 드물게 픽사와 디즈니가 짬뽕된 유머들이 나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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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글

  • dcdc 2009/01/02 16:18 # 답글

    와 정말 멋진 리뷰입니다 :)
  • 눈아이 2009/01/02 16:32 # 답글

    글 재미있게 잘 읽고 갑니다. ^^
  • 혜원 2009/01/02 19:29 # 답글

    월-e를 정갈한 최고급 요리로 치자면 볼트는 레시피는 무난해도 정성들여 만든 집밥 같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리뷰 잘 읽었습니다.^^
  • compos 2009/01/02 21:09 # 답글

    오늘 입체상영관에서 보고 왔는데
    영화관에서 나오니 문득 '이거 유니버설 까는 영화 아니야?'란 생각이 문득 들더군요 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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