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0살 생일 맞는 디즈니의 판타지아 디즈니 리뷰

70살 생일 맞는 디즈니의 판타지아
Fantasia 1940 (roadshow) , 1942 (wide)

예전에 쓴 글을 다시 인용해야겠군요. 2006년 즈음에 국립 중앙 박물관이 안인택 기념재단으로부터 기증받은 안익태 선생의 유품을 공개한 바 있는데 그 중 유별난 관심을 끈 작품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바로 월트 디즈니가 냅킨에 이렇게 도널드 덕을 그려 준 것이었지요.

레스토랑에서 직접 그려 선물한 것이라고 하는데 그 역사적 가치에 대해선 말할 필요도 없고 악기를 다루는 도널드 덕을 볼 때 그림이 나올 시기에 두 사람이 어느정도의 친분이 있었다고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딱히 다른 에피소드가 공개되지 않아 명확하게 이거다 싶은 얘기는 없지만 1940년에 발표된 판타지아에 대한 제의가 안익태 선생에게 갔다는 풍문이 있어요. 실제 디즈니는 클래식 애호가였다고 합니다. 디즈니의 클래식 선호도에 대해서는 논쟁이 있긴 한데 미디어 비평가이자  'The Triumph of the American Imagination'의 저자 닐 개블러에 의하면 그가 클래식에 대해 박학다식했다는 게 지배적인 의견이라고 하는군요. 디즈니가 대중의 주목을 받고 유명해진게 20년대 후반이니까 두 사람의 만남은 나이대를 생각해보면 30년대 중반 즈음이 아닐까 합니다. (안익태는 1906년 생이고 30년에 졸업후 미국으로 유학을 갑니다)

판타지아의 제작이 시작된 것은 1938년도의 일입니다. 사실 판타지아의 제의가 안익태 선생에게 들어갔다는 일화는 조금 빡빡한 역사의 시계태엽에 의지하지 않으면 안될 듯 싶습니다. 그도 그럴 것이 실제로 1937년까지 디즈니는 백설공주와 일곱 난장이를 제작하느라 그의 인생 중 가장 복잡하고 어려운 시기를 보내고 있었습니다. 집까지 저당잡혀 만화를 만들고 있었으니 이런 가운데 판타지아의 기획이 구체적으로 오고 갔을 리가 만무하지요. 백설공주의 기록적인 상업적 성공이 판타지아의 제작에 구체적인 기반이 된 것은 분명 확실한 일입니다. 그래서 만일 안익태 선생에게 디즈니가 판타지아를 제의를 했다면 37년도 후반이나 38년도 초반의 일이어야 할텐데 안익태가 유럽에 가서 대학원 졸업과 교향악단 지휘를 시작한 게 36년 이후의 일이니 이게 시간이 좀처럼 잘 맞지가 않습니다. 아무튼 결국 판타지아는 당시 유명한 지휘자인 Leopold Stokowski를 만난 것을 계기로 그에게 맡겨졌다고 합니다.

FANTASIA

판타지아는 디즈니의 세번째 장편 애니메이션 입니다. 말한대로 37년 백설공주가 거둬들인 막대한 금전적 이익은 40년대 후반까지 디즈니 스튜디오에 영향을 미쳤는데 피노키오가 전쟁중에 개봉한 탓에 큰 손실을 보았음에도 후속작인 이 작품이 나올 수 있었던 건 그만큼 디즈니의 확고한 의지가 있었기에 가능했을 것입니다. 영화는 다양한 기획의 발판으로 마련되었습니다. 30년대에 인기가 떨어지기 시작한 미키마우스의 재등장과 디즈니가 이상적으로 추구하는 음악적인 기술을 만들어내기 위해 제작비는 2백만불을 넘어가기 시작했습니다. 최초로 영화에 스테레오 사운드를 도입시키는데 성공했고 6개의 독립적인 사운드 채널을 활용해 음악에 입체성을 부여했습니다. 개봉 당시 디즈니는 프로그램의 제작은 물론 좌석에 예약제를 도입해 경험의 원본을 파괴할 것을 지시했습니다. 이런 과정을 통해 과거에는 소수의 전유물이었던 예술은 그와 동시에 대중을 수용하고 그를 주체로 삼기 시작합니다. 원본의 아우라가 파괴되는 혁명의 과정은 '판타지아'를 통해 극히 심화되기 시작했습니다. 이제 Leopold Stokowski의 값비싼 연주는 어디서나 극장 표값만 있으면 가장 최상의 품질로 들을 수 있었죠. 디즈니는 시뮬라크르를 동정했습니다. 극에 등장하는 음악 평론가 딤스 테일러의 친절한 해석과 더불어 클래식의 고고한 위상은 대중 속으로 파괴되었습니다.

그러나 그런 바람은 지나치게 이상적이었죠. 영화는 대중의 호응을 얻지 못했고 평론도 반은 회의적이었어요. 고전주의적 인식론을 따른 백설공주의 호평은 그런 면에서 이 작품의 다분히 포스트 모던적인 방식과 파괴적인 융합에 배치되는 것이었습니다. 당시 대중이 받아들이기에 지나치게 진보적인 작품이었던거지요. 이 작품은 80년대 mtv로 상징되는 영상 혁명시대에 다시 그 기념비적 성격을 인정받기 시작했습니다. 더불어 2000년에는 판타지아 2000이란 이름으로 후속편을 만들어졌는데 다분히 디즈니로선 상징적인 기획입니다. 영화는 디자인과 그림, 음악의 무분별한 융합을 통해 예술적 감흥이 공감각적인 형상를 지니기 시작할 때 어떤 모습으로 변모되는지 철저하게 실험했고 21세기를 사는 수많은 대중들에게 그 선구가 누구인지 재확인시켜줍니다.



그런 실험은 세가지 형태로 나뉘어 집니다. 첫째는 명확한 이야기, 두번째는 불분명한 플롯과 그의 역할을 대체하는 그림, 그리고 마지막은 음악 그자체이죠. 이 세가지는 예술의 역사를 상징하는 것처럼 느껴지죠. 역사를 지탱해온 고전주의적인 양식과 20세기초 아방가르드의 등장 그리고 그마저 전복시킨 뉴먼의 '숭고' 쯤으로 분류해둡시다. 어떤 에피소드가 어떤 실험을 하고 있는지 구분하는 것도 재미있는 감상방법입니다. 가장 흥미로운 시퀸스는 세번째 양식입니다. 바흐의 토카타와 푸가 (Toccata and Fugue in D minor BWV 565)가 나오죠. 처음에는 애니메이션적인 기교보다는 색과 조명, 그림자 놀이에 가까운 묘사로 음악 그 자체의 숭고함을 일어나게 만들고 이후에는 기하학적임을 포기한 추상과 독특한 애니메이션 효과로 감각적인 쇼크를 주는 데 주력합니다. 조금 더 구체적인 묘사를 입힌 차이콥스키의 호두까기 인형은 조금 더 디즈니적인 묘사입니다. 이 경우는 대상이 분명해 시각적으로 조금 더 충실합니다. 작품에는 나름의 오락적인 요소도 충분해서 지휘자와 미키가 만나는 장면이나 전통적으로 단편 애니메이션에서 얻어온 개그적인 요소나 시각적 공포 창출도 탁월합니다. 슈베르트의 음악이 어우러진 악마의 모습은 외형적으론 단순화 되어있지만 분위기의 사실성은 놀랍도록 뛰어나죠.

 



디즈니의 재기발랄한 해석은 약간의 스토리가 가미될 때 좀 더 분명해지는데 베토벤의 전원 교향곡이 올림푸스의 신화로 해석된 것이나 극의 분위기를 충실히 재현한 슈베르트의 아베마리아, 애초에 스토리를 먼저 기획하고 음악을 입힌 마법사의 제자같은 경우가 그러합니다. 마법사의 제자는 이 영화에서 가장 유명한 시퀸스인데 디즈니 역사상 가장 변칙에 가까운 이 작품에서 가장 원래의 디즈니스러운 이 에피소드가 오랫동안 기억된다는 게 좀 흥미롭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시각과 다른 감각의 충격 중 어느 것이 더 오래 기억에 남는지 20세기 예술계를 강타한 이 비교 실험은 판타지아에 와서 일단 첫번째로 구체화되었습니다. 무엇이 이겼는지는 각자의 감상에 맡겨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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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글

  • dcdc 2009/01/05 18:10 # 답글

    옛날이나 지금이나 디즈니가 아니면 절대로 하지 못할 시도라고 생각합니다. 규모면이든 내용면이든. 2000을 친구네 커다란 TV로 봤을 때의 감동은 어마어마하면서도 '아 왜 극장에서 보지 못했을까'하는 아쉬움도 가져다 주어지요 oTL
  • jun Boy 2009/01/06 00:14 #

    요새는 돈이 있어도 좀처럼 실험작을 내놓는 제작자나 감독들이 없죠. 아이맥스로 재개봉하면 좋을듯 싶네요. 그것도 먼나라 일이겠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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