숏버스, 포르노가 아니다. 미디어탐구

숏버스, 포르노가 아니다.

이천년전 잿더미에 묻혀 일순간에 문명의 흔적이 지워져 버린 폼페이의 벽화에는 당시의 퇴폐적인 문화를 가르키는 야한 그림들이 많았다. 다들 노골적인 섹스에 대한 직접적인 묘사다. 왜 이런 그림을 그렸을까. 관능을 추구하던 헬레니즘이 국소적으로 진화한 것일까. 아무튼 그 옛날에도 포르노그라피가 존재했다. 그러나 묘사의 정밀도가 극도로 높아진 현대에 그 포르노들은 고전 예술의 한 파편일 뿐이다. 혹자는 여기서 고대인의 성생활을 엿볼 수 있다고 감탄했다는데 당대의 포르노그라피가 현대에는 예술이 되고 사료가 된 것이 무척이나 흥미롭기 그지없다. 이렇게 묘사의 섬세함이 뒤떨어지는 옛날 음란물(?)들이야 그 본래의 기능을 잃었다지만 고화질 영상이 기본이 된 현대의 외설과 예술들은 어떻게 구분해야할까.

영등위로부터 음란물 판정을 받았던 영화 숏버스가 대법원 판결하에 일반 상영관에서의 상영이 가능해졌다고 한다. 대법원은 영등위의 상고를 기각하고 1심, 2심 재판부의 판단에 손을 들어주었다. “<숏버스>는 다수의 영화제에서 공식 상영되었고 영화평론가들로부터도 그 주제와 음악·영상 등의 면에서 예술성을 인정받고 있다”“이 영화를 단지 성적 흥미에만 호소하는 음란영화로 보기는 어렵고 정상적인 인간관계를 훼손하거나 미풍양속을 해치는 영화로 보기도 어렵다"이게 1심과 2심 재판부의 판단이다.

영화 숏버스는 어떤 관점에선 포르노에 가깝다. 섹스씬이 많기도 하지만 다채롭기도 하다. 성기가 노출되고 삽입, 분출 가릴 것없이 다 나온다. 영화는 소통이 불가능한 인물들이 숏버스라는 상징적 공간을 통해 치유되는 과정을 그린다. 그 과정에는 섹스가 개입된다.

그렇지만 어떤 관점에서 이건 그냥 행위에 불과하다. 음란하다는 건 무엇일까. 내가 느끼기엔 상당히 개인적이고 관념적인 단어인데 미국의 어느 법관이 "I know it when I see it" 이라는 표현을 썼다고도 한다. 의역하자면 나를 흥분시키는게 포르노다, 이정도의 의미아닐까. 그리고 그 관점에서 보았을 때 이 작품은 그렇게 포르노로서 흥미롭지 않다. 음란해 보이기보다는 오히려 무척이나 고통스럽게 느껴진다. 자신의 성기를 아크로바틱한 자세로 탐하는 모습은 보기가 안쓰럽다. 게다가 이들은 곧잘 관계 후 울음을 터뜨린다. 보고 싶은 것만 보여주는 포르노로서는 실격이다.

그렇다면 왜 하필 섹스라는 행위가 들어갔을까. 영화는 담담하게 관계를 맺고 자위를 하는 인물들을 지켜본다. 인물들을 대위법적으로 배치시키는 거 말고는 섹스를 묘사하는데 특별한 편집이랄게 없다. 극중에는 '보는 것도 참여하는 것'이란 대사가 한번 나오는데 이 맥락에서 보면 영화가 추구하는 관계의 사실성은 다분히 능동적이고 기능적이다. 영화는 지각보다는 감각을 요구한다. 보고 들음으로써 뇌가 말초적으로 활성화되는 것이 아니라 촉각적으로 기능하는 섹스, 중요한 것은 이들의 섹스로부터 느껴지는 고통을 관객이 느끼고 체험하는데 있다.

그를 통해 섹스-관객이 아닌 섹스-영화-관객의 새로운 포지션이 요구된다. 영화는 포르노가 지니는 달콤하고 말초적인 욕망을 아무런 기교가 없는 카메라를 통해 제거한다. 영화 속 섹스는 포르노처럼 관객이 주체가 아니다. 당연히 그 행위는 즐거운 대상으로만 군림할 수가 없다. 그 빈틈을 채우는 것은 연출가의 몫이다. 동시에 은유적인 해석을 가능케 하는 전략이 등장한다.

영화에는 굉장히 재미있게 느껴지는 한 장면이 나오는데 잭슨 폴록의 작품처럼 느껴지는 액션 페인팅 방식으로 그려진 그림에 정액이 튀는 장면이 그것이다. 그리는 과정의 무질서가 중요하게 여겨지는 그림에 정액은 마치 물감처럼 튀어 또 하나의 비정형적인 요소로 들어간다. 영화는 그 그림처럼 미적 정보를 나열하듯 섹스의 이미지를 나열한다. 이미지가 나열되며 그들의 섹스는 무한히 혼돈스러운 공간의 일부가 된다. 모두가 융합하고 미쳐가는 장소인 뉴욕에서 그들은 그렇게 엉키고 하나가 된다. 여기서 혼돈스럽게 엉키는 이미지의 배열 자체가 섹스이고 그 물감은 인간 그 자체의 은유가 된다. 아마도 극중 인물이 그 그림을 유심히 보는 것은 그런 의미가 아닐까. 그래서 이들의 섹스는 참 지루하다. 주체가 전적으로 영화 속 그들 자신인 이들의 섹스는 개성적이지만 지루하기 짝이 없다. 그것은 그들이 자기 자신을 위로하기 위한 발악에 가깝다. 보는 이의 성욕을 만족시켜주기 위한 쇼가 아니라.

섹스씬이 나오는 영화는 많다. 저마다 목적도 쓰이는 방식도 다르다. '몽상가들'에서 근친상간 코드와 실제성교를 삽입한 베르나르도 베르톨루치는 혁명과 섹스의 상관성에서 영감을 받아 영화를 완성했다고 한다. 어쨌거나 고전적이지만 다분히 현대적인 논란인 예술과 외설의 차이는 결국 연출자가 섹스를 다루는 방식에 있는지도. 그리고 그걸 느끼는 관객이 어떻게 수용하느냐에도 달려 있는 것 같다. I know it when I see i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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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숏버스 (Shortbus, 2006) 2009/03/25 21:17 #

    선뜻 손 내밀고 싶은 그 쾌청한 낙원 토마스 알프레드슨의 중 가장 인상적이었던 장면 하나를 떠올려보자. 이엘리와 오스칼이 문 하나를 사이에 두고 서 있다. 이엘리는 문을 비집고 오스칼의 집으로 들어가고 싶어한다. 하지만 불행한 사실 하나, 이엘리가 온전히 오스칼의 집으로 들어서기 위해서는 오스칼의 의사가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그가 들여보내주지 않으면 이엘리에게는 댓가가 따른다. 아니나 다를까, 이엘리의 피부 속 온갖 신경을...... more

  • 대립은 싫어요, 섹스를 하세요! 2009/10/28 09:24 #

    '저는 그녀의 몸 위에 올라와 있었어요. 밤이었고, 우리 둘은 침대에 엉켜있었죠. 그녀의 몸 안으로 계속 제 몸이 들어갔습니다. 그래요, 섹스를 하고 있었어요. 신음이 터져 나오면서 저는 절정에 다다랐습니다. 행복했어요. 그런데, 과연 그녀는 행복했을까요? 황홀한 눈으로 그녀를 바라보았을 때, 그 순간을 잊지 못할 거예요. 그녀는 행복하지 않았거든요. 눈을 감으며 애써 아픔을 참는 그녀는 고통스러워하고 있었어요. 사정하지 못한 제 성기가 빠르게...... more

덧글

  • dcdc 2009/01/24 11:43 # 답글

    어쨌든 이런 작품들의 개봉이 가능해졌다는 것에서만큼은 세상이 발전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
  • JinAqua 2009/01/24 13:18 # 답글

    동성애뿐만 아니라 이런 영화도 우리나라에서 개봉이 가능해졌군요.
  • 평담 2009/01/24 14:05 # 답글

    이 영화 상영불가 판정 받았을 때 무척이나 실망했던 기억이 납니다^^; 반가운 소식이네요.
  • 아진 2009/01/24 16:42 # 답글

    참고로 단체응응씬의 엑스트라중에 감독이 섞여있답니다. 저도 처음엔 몰랐는데..ㅎㅎ;
    그리고 중국계 여성을 맡았던 배우는 이 영화를 찍고 직장을 잃을뻔했는데 다행히 잘 무마되었다는 뒷소식도 있습니다.
  • NoLife 2009/01/24 17:21 # 답글

    포르노와 예술의 가장 큰 차이는 무엇을 목적으로 하고 있느냐...에 있지 않을까요.

    특정행위를 보여주는 것으로 끝난다면 그건 포르노에 그치는 것 뿐이고, 특정행위를 통해 다른 무언가를 보여주려한다면 그것은 예술이 될 수 있다고 봅니다.

    결국 목적으로의 에로냐, 수단으로의 에로냐...라는 문제겠죠.
  • MAGO 2009/01/24 20:22 # 답글

    저도 많은 얏옹-_-과는 다른 느낌을 받았어요. 보고나서야 진짜 예술하고 포르노의 경계가 있구나 느꼈어요. 좋아하는 영화중 하나라서인지 이 영화가 화자 되면 기쁘네요.
  • 잠본이 2009/01/24 23:04 # 답글

    '몽상가들'도 실제로 보면 되게 지루하죠 OTL
  • 2009/01/26 22:22 # 답글

    비공개 덧글입니다.
  • :) 2009/07/23 01:34 # 삭제 답글

    위엣분
    중국계여성을 연기한 연기자는 한국인입니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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