헤라클레스 Hercules (1997)

헤라클레스에 대해 물었을때 그 원전이 되는 신화에 대해 완벽하게 알고있는 사람은 드뭅니다. 저도 기억나는 것은 그가 매우 힘이 센 남자라는 것과, 아들을 죽인 비정한 아비이고 생부의 처에게서 혹독한 미움을 받은 비극의 주인공이라는 것 밖에 없지요. 그가 겪은 구체적인 모험은 잘 기억나지 않아요. 하긴, 중요한건 엄청나게 힘이 센 남자라는 것, 이게 모두가 기억하는 헤라클레스 신화의 포인트입니다.
디즈니도 원작을 그대로 살릴 마음은 전혀 없었을겁니다. 노틀담의 곱추때도 그랬지만 이 경우는 좀 더 획기적인 각색이 필요했을 거에요. 그리스의 비극들은 원래 줄거리와 캐릭터들을 대책없이 엉켜놓고는 급격한 운명의 전환을 통해 행복한 그리스인들에게 비극의 카타르시스를 주는데 목적이 있던 펄프픽션같은 것들이었으니까요. 디즈니의 영화가 이런 기능을 반복할 필요는 없겠지요. 감독인 존 머스커와 론 클레멘츠는 그리스 신화에서 다채로운 신들과 그들의 일부 특징만 빌려온채 평소 그들이 하던대로 완벽하게 새로운 이야기를 써내려 갑니다. 흡사 인어공주처럼 말이죠.
(뮤즈들)
좀 신선하기는 해요. 애초에 영화는 원작의 신화와는 정반대로 비극적 성격을 버릴 것을 선포하는 것으로 시작되거든요. 대배우 찰튼 해스턴(작년에 세상을 떠났어요)이 엄숙한 목소리로 헤라클레스 신화의 시작을 알리는데 갑자기 그리스 토기 속에서 나타난 뮤즈들이 "이게 무슨 비극인줄 아시나"하면서 놀려댑니다. 뮤즈들은 이야기에는 직접적인 영향력을 행사하지 않지만 극의 뮤지컬적인 성격을 확고하게 만드는데 중요한 역할, 그러니까 고대 그리스 희곡의 코러스 역을 맡고 있습니다. 단지 이야기를 압축하고 관객에게 메세지를 전달하는 것뿐만 아니라 사실상 극중에서 가장 시각적으로 매력적인 장면들을 제공해주죠. 이들의 흥겨운 노래는 화려한 군무에 더해져 뮤직비디오식 구성으로 관객들의 심장을 두근거리게 만듭니다. 이게 가장 잘 드러난 씬이 바로 Zero To Hero지요.
사실 영화에서 가장 돋보이는 점은 음악과 캐릭터들의 개성적인 외향입니다. 음악들은 대개 다채롭게 편곡된 가스펠이고 꼭 시스터액트에 나오는 곡들 같습니다. 영화의 음악을 맡은 알란멘켄은 이전에 그가 보여주었던 거대한 합창곡들, Under The Sea, Belle, Be Our Guest같은 곡들의 영감과 에너지를 현대적인 색체를 입혀 마음껏 발산합니다. 비록 멜로디는 지나친 연속 작업의 영향으로 매너리즘의 늪에 빠져 있었다지만 데뷔작 이후로 이 영화만큼 그의 재기발랄함이 발휘된 작품도 드물지요. 그러나 이 작품 이후로 2004년에 카우 삼총사를 발표할 때까지 알란 멘켄은 디즈니의 애니메이션에서 손을 떼게 됩니다.
(헤라클레스가 아이돌스타로)
한편의 거대한 희극으로 바뀌면서 캐릭터들도 많이 달라졌습니다. 영화의 헤라클레스나 제우스나 다들 기존의 신적인 능력만 유지한채 전부 다시 채워지고 그려졌죠. 심지어 이 작품에는 헤라가 헤라클레스의 친엄마로 설정되어 있고 제우스는 무척이나 가부장적인 인물로 나오는데 원작 신화의 팬이라면 '디즈니식 착한 가정'에 질색할 수도 있겠습니다. 인간들의 온갖 욕망을 모사해다놓았던 본래의 신들의 이야기는 마법과 액션의 뼈대만 남기고 축소되었고 교훈도 뚜렷히 부각됩니다. 그런 인간다움이 소거되었다는 명확한 사실은 이야기적 흥미를 반감시키지만 신화가 기대고 있던 정치적으로 공정치 못한 묘사들 역시 함께 날아간 것은 나름대로 재미있는 각색의 흔적입니다. 오히려 이렇게 뒤바뀌고 단순해진 줄거리가 더 반가운 사람도 충분히 있을 수 있다는 이야기이죠.
애초에 신화라기보다는 동화에 가깝고 텔레비전용 단편 슈퍼히어로물의 느낌도 적나라합니다. 그만큼 이야기는 도식적이고 오락적인 구성에 충실하며 한마디로 말하면 다분히 현대적이에요. 고전성이 파괴된 이야기는 대신 현대적인 소도구들, 자본주의와 아이돌 스타같은 것들을 들이밀고 깨부셔 재조립합니다. 심지어 미술도 복합적이죠. 고대 이집트의 벽화 양식에서 앤디워홀식의 팝아트까지 영화는 재미나고 쓸만한 텍스트라면 모조리 빌려온 듯한 느낌입니다. 고대 아테네마저 영화 속에서는 현대 뉴욕으로 둔갑할 정도로 이야기와 설정이 톡톡 튀게 각색되었습니다.
영화는 헤라클레스가 악역으로 설정된 하데스의 음모로 신의 능력을 잃으면서 시작됩니다. 하데스는 헤라클레스가 없을 때에만 신들의 왕이 될 수 있다는 예언을 받지요. 그러나 하데스의 바보같은 부하들 덕분에 헤라클레스는 능력을 반만 잃게 되고 덕분에 엄청난 힘은 유지하게 된 채(너무나도 중요한 포인트니까) 인간들에게 길러집니다. 이제 세월은 흘러 남다른 힘때문에 따돌림을 당하던 청년 헤라클레스는 자기가 제우스의 아들이란 사실을 알게되고 다시 신의 위치를 회복하기위한 모험을 떠나지요. 제우스는 그가 신이되기 위해선 진정한 영웅이 되어야한다고 알려주고 하데스는 팜므파탈인 메가라를 이용해 더 치밀한 계획을 세웁니다.
(메가라와 그녀의 명곡)
영화 속 헤라클레스는 원작 신화에 비하면 단순하고 평범한 인물이고 좀 전형적입니다. 흡사 스타가 되고 싶어하고 일확천금을 바라는 몽상가적 기질-지긋지긋한 아메리칸 드림-이 다분한 요즘 십대 아이들의 패러디같은 느낌인데 그런 헤라클레스에 비하면 여주인공인 메가라가 훨씬 더 개성적이고스토리에서도 핵심적인 키를 지니고 있습니다. 본래 신화에는 없는 캐릭터인 메가라는 하데스의 몸종이면서 비극적 과거를 지닌데다 음해의 대상인 헤라클레스에게 빠져버리는 옛 헐리우드 첩보물에 나올법한 캐릭터인데 디즈니 영화들에서는 꽤 참신하게 느껴지지요. 생긴 것답지 않은 걸걸한 목소리는 뮤지컬 배우 수잔이건이 맡았는데 디즈니의 미녀와 야수 뮤지컬 버전에서 벨 역을 맡기도 했습니다.

메가라만 봐도 확연하지만 캐릭터의 디자인이 매우 독창적이지요. 디즈니 특유의 둥근 스타일을 좋아하던 사람이라던 마음에 들지 않았겠지만 핑크 플로이드와의 작업으로도 유명한 일러스트레이터 제랄드 스카프가 만든 디자인은 캐릭터의 외형속에 이야기를 담아내고 영화의 팝적인 분위기하고도 잘 어울립니다. 특히 신들의 디자인은 한 눈에도 누군지 알아볼만큼 포인트가 살아있는데 누가 누군지 맞추는 것도 재미있는 일입니다. 당시에는 그 과장됨이 낯설었지만 지금은 왠지 그게 이 작품을 더 돋보이게, 기억나게 만든 것 같군요.
+나중에 나온 텔레비전용 단편들이 본편보다 더 재밌어요. 디즈니 만화동산에서도 방송했지요.




덧글
크롱크 2009/03/15 22:40 # 답글
전 극장판 애니메이션의 티비용단편은 왠지 싫었어요. 제대로 챙겨본적이 없었죠. 그냥 극장판 느낌 그대로 남아주었으면 하는생각에... 그래서 비디오용속편제작중단소식에 매우 기뻤습니다 ㅎ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