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녀와 야수 Beauty and the Beast 1991

위대한 작품은 작품 자체보다 작품에 붙는 수식어로 기억되는 일이 많습니다. 미녀와 야수는 애니메이션으로는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아카데미 작품상 후보에 올랐던 작품이고 처음으로 북미 박스오피스에서 1억불을 넘긴 애니메이션이며 골든 글로브 작품상을 받은 최초의 애니메이션입니다. 또 있어요.
아카데미 주제가상에 한 영화의 음악이 세곡이나 후보로 오른 것도 처음이고 월트 디즈니 사망 후 미국 국립영화 등기부에서 역사적으로 중요하다고 인정한 유일한 2D 애니메이션이며 CG기술을 부분적으로 차용한 기술적인 영향력은 이후 전세계 모든 애니메이션에게 영향을 주었습니다. 아직도 진기한 기록행진은 잔뜩 남았습니다. 그렇지만 그 모든 수식어와 상들, 언어적 꾸밈들이 이 영화와 직접 대면하는 기쁨보다 크지는 않을 것입니다.
(92년 아카데미 시상식 공연.)
미녀와 야수는 보몽 여사가 쓴 동명의 프랑스 동화와 역시 46년에 영화로 만들어진 시적 리얼리즘의 거장 장 콕토의 영화 '미녀와 야수'를 모두 원작으로 두고 있습니다. 장 콕토의 영화가 프로이트적 상징과 거기서 찾아내는 인간 내면의 진실을 아름답게 포착했다면 디즈니의 영화는 전적으로 누가 봐도 즐거운 가족용 오락영화에 가깝지요. 20세기 헐리우드 영화들의 상징과 다름없는 well made play, 잘쓴 각본과 시각적으로 풍부한 요소들로 채워진 애니메이션, 대형 브로드웨이 뮤지컬을 연상시키는 고전적인 음악들의 협연을 보여준 작품은 미국 애니메이션 역사의 이정표를 찍는 거대한 상징처럼 남아있지만 실제로 보면 정교하고 날렵하게 다듬어진 예쁜 소품처럼 느껴집니다.
미녀와 야수는 동화의 외피를 두르고 있지만 헐리우드의 전형적인 로맨틱 코미디같은 분위기를 풍기고 있습니다. 어긋나는 캐릭터를 가진 두 남녀가 티격태격하다 사랑에 빠지고 만다는 스크류볼 코미디같아요. 단지 여기서는 그런 갈등을 유발해내는 계기가 조금 더 동화답지요. 그렇지만 너무 유치하지도 뻔하지도 않습니다. 영화는 끊임없는 긴장을 유발하면서 비극의 경종을 울리고, 관객들의 웃음을 터뜨리고, 80분가량의 짤막한 이야기는 인상적인 에피소드들과 무게감있는 메세지로 가득 메워집니다. 전환점을 맞이하는 시점과 클라이막스에 이르는 과정이 모두 매우 정석적이에요. 어느 한구석도 느슨하게 조율되지 않았고 이 달달하고 짜임새있는 영화의 뒷맛은 깔끔하면서도 몹시도 강하게 맴돕니다.
영화의 이야기는 이음새가 보이지 않을 정도로 촘촘하게 연결되어 있는데 주요 인물들의 성격이 잘 구성되고 그들의 강렬한 의지가 극을 자연스럽게 끌고 나가기 때문입니다. 인물들도 이전의 동화적이고 평면적인 캐릭터들과 다르게 인어공추처럼 현대적인 색을 입었고 생생하게 살아있는 것같지요.
가령 여주인공 벨은 80년대 페미니즘 미디어의 영향력을 수혜받은 캐릭터로, 여성을 도구화시키는 남성(가스통)의 야만성에 대한 폭로와 당당한 거부 그리고 독립과 정체성을 추구하는 자의식의 성장을 보여줍니다. 허례적이고 낭만적인 사랑을 꿈꾸지만(독서광이라는 설정인데 읽는 책은 죄다 할리퀸 로맨스류) 결국에는 진실된 사랑은 그런 운명적임과 겉치례적인 것만은 아니라는 것을 깨닫는 성숙한 면을 보이지요. 디즈니 스튜디오는 원작에 있던 '벨이 야수가 사람으로 변하는 꿈을 꾸는 대목'을 의도적으로 삭제하고 대신 벨을 훨씬 이상적인 사랑을 추구하는 여자로 만들어 주었습니다. 가령 이 영화에선 마지막에 야수가 왕자로 돌아오고나서 벨이 왕자의 눈 속에서 자신이 사랑했던 야수의 눈을 발견하는 씬이 들어갔습니다. 조금 더 로맨틱한 결말인 셈이지요. 당시에는 급진적이고 진보적이라고 평가받았던 이런 구성이 21세기에는 영화 슈렉에 이르러 한번 더 뒤집어졌으니 세월의 변화가 참 빠르기도 합니다.

표면의 야만적임과 속의 순수함이 대립을 이루는 캐릭터인 야수는 생각보다도 재미있는 캐릭터로 만들어졌습니다. 쉽게 화내고 흥분하지만 벨에게 잘보이고 싶어하는 그런 어리숙하고 귀여운 면도 영화 속에서 종종 보이지요. (영화에서 21살로 설정되어 있습니다.) 영화는 전환점을 맞이하는 과정을 벨과 야수의 관계가 변하는 부분으로, 클라이막스는 가스통과 야수의 대립으로 포인트를 잡아 놓았습니다. 야수와 가스통의 대조는 영화가 이야기하는 '진실한 아름다움'에 대한 가장 중요한 부분이라고 할 수 있어요. 벨과 야수, 가스통의 관계가 영화의 갈등을 이루는 핵심적인 구조라면 나머지 조연 캐릭터들은 영화의 완급조절과 오락적인 요소에 영향을 미칩니다. 성 안에 사는 마법에 걸린 캐릭터들- 뤼미에르, 콕스워드, 폿츠부인은 딱 필요하다고 생각되는만큼의 기능성을 발휘하지요. 모두 특색있고 재미있는 조연들입니다. -폿츠 부인은 제시카의 추리극장으로 유명한 안젤라 랜즈버리가 역을 맡았고 뤼미에르 역의 제리 오바크는 지난 2004년에 사망했습니다.
(역시 92년 아카데미에서 주제가 공연. 안젤라 랜즈버리와 셀린디온, 피보 브라이슨이 함께 나옵니다.)
영화는 발전된 기술을 사용함에 있어 첫삽을 뜬 것은 아니지만 가장 성공한 롤모델을 제시하기도 하였습니다. 이 영화 이후에 애니메이션에 본격적인 CG도입이 활성화되기도 했고요. 영화에는 의도적으로 CG기술을 뽐내면서도 그게 눈치채지 못할만큼 자연스럽게 삽입된 장면들이 많아요. 가령 첫 뮤지컬 씬인 Belle에서 벨을 중심으로 카메라가 회전하는 장면같은 것들 말입니다.
영화의 특수 효과는 거의 배경을 위해 쓰였습니다. 그리고 배경의 발전은 곧 애니메이션 속 카메라 움직임의 혁명을 낳았지요. 예전 디즈니 영화들, 이를테면 백설공주나 밤비같은 영화는 원근감을 주기 위해 배경을 여러 요소로 나누어 층으로 거리를 두고 촬영하는 어려운 방식을 썼지만 이제 미녀와 야수를 기점으로 더 진짜같고도 환상적인 연출이 가능해진 것입니다.
개중에서도 가장 인상적인 씬은 역시나 발룸댄스 장면인데, 기묘할 정도로 계산적이면서도 우아하고, 애니메이션만의 독특함을 과시하는 장면이지요. 카메라는 벨과 야수의 댄스를 정적인 이미지로 잡다가 갑자기 그들을 지나쳐 천장의 샹들리에로 힘있게 뻗어갑니다. 그리고 천장에 그려진 아기천사들의 움직임을 잠시 비춘 후 다시 부드럽게 카메라를 내립니다. 천장에서 대각선 구도로 곡선을 그리며 카메라가 내려오는데, 춤을 추는 둘은 화면 중심에 놓이지않고 살짝 어긋나게 움직이고 있지요. 영화의 전체적인 미술테마는 이처럼 바로크적입니다. 고전적이되 인간적인 충동이 넘실거리죠. 기술의 발전과 예술가들의 창조의 정신이 한데 어울려 만들어낸 경이로운 연출입니다. 무엇보다 즐겁고 로맨틱하고요.





덧글
잠본이 2009/03/30 22:24 # 답글
디즈니 부활의 결정타라고도 할 만한 작품이지요.
개슈털트 2009/03/30 23:00 # 답글
정말 이루말할 수 없이 큰 쇼크와 감동을 받았던 기억이 나네요ㅠㅠ
한다나 2009/03/31 00:18 # 답글
정말 감동이었죠 ㅠㅠㅠㅠㅠㅠㅠ 지금 들어도 정말 아름다운 음악과 영상이에요..
2009/03/31 01:11 # 답글
비공개 덧글입니다.
NeverDie 2009/03/31 11:22 # 답글
be our guest 참 좋아합니다.. ost 사서.. 많이 듣곤 했었죠... 나름 영어 공부도 한다 생각하면서..
blue303 2009/04/01 05:02 # 답글
알렌 멘켄 - 하워드 애쉬먼 조합이 가장 빛났던 작품이 아니었나 싶습니다. 애쉬먼이 AIDS 로 죽은 것이 안타까왔죠.
jun Boy 2009/04/01 23:15 #
작사만 하는게 아니라 스토리에도 참여했는데 참 재능을 못다쓰고 떠난게 안타깝습니다. 살아있었다면 디즈니 전성기때 영화들이 더 좋은 질로 나올 수도 있었다고 생각해요.잘 보고 갑니다..^^ 디즈니 특유의 뮤지컬 형식 애니메이션을 참 좋아했는데...알렌 멘켄의 주옥같은 노래들도 너무 좋았구요. 요즘엔 디즈니에 그런 애니메이션이 없어서 너무 아쉽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