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0주년 맞이한 디즈니의 걸작 피노키오 디즈니 리뷰

피노키오 Pinocchio (1940)

(1940년 당시 포스터)

최초의 장편 애니메이션 '백설공주와 일곱 난장이'는 영화 '타이타닉'같은 거대한 히트작이었고 단숨에 디즈니가 만들 수 있는 최고의 걸작으로 평가되었지만 실제로 월트 디즈니는 백설공주의 개봉 이후 그 작품의 여러 가지 불만족스러운 점 때문에 상당히 고민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처음으로 장편극을 만들면서 여러가지 실험과 시행착오를 겪으며 많은 것을 배우게 되었지만 그런 깨달음을 비로소 작품을 끝낸 후에야 알게 되었기 때문이었죠. 백설공주는 영화사에 길이 남을 걸작이지만 디즈니가 생각하는 완벽한 이상이 구현된 영화는 아니었습니다.

(70주년 기념 DVD)

'피노키오'는 그런 디즈니가 두번째로 만들어낸 장편 애니메이션이고, 백설공주로 거둬들인 막대한 자본을 아낌없이 투자해 온갖 영화적 실험과 예술가적 역량을 더해 만들어낸 디즈니사 최고의 걸작입니다. 영화는 단순히 애니메이션의 가능성의 극한에 도전한 것 뿐만 아니라 어떤 실사 영화와 견주어도 부럽지 않은 드높은 완성도를 자랑합니다. 가령 이 영화 속에서 세명의 악당들이 음모를 꾸미는 장면은 스크린 지형학의 가장 모범적인 예로 손꼽히고 영화의 효과음으로 전자음악의 도입(노바코드를 사용해 빛이 다가오는 것을 표현했습니다)을 시도한 혁신적인 면모나 영화사에서 손꼽히는 명장면인 마지막 고래 몬스트로와의 대결 시퀸스는 후대에 많은 영화인들에게 영향을 주었습니다.

(생명을 얻게 된 나무인형이 온갖 고난을 딛고 진짜 소년이 되는 이야기.)

본래는 실험적인 자연주의를 도입한 애니메이션 '밤비'가 두번째 작품으로 예정되었지만 동물 표현의 어려움으로 애니메이터들은 피노키오를 먼저 앞당겼고 비교적 빠르게 2년만에 작품을 완성했습니다. 금전적인 면에서 자유로웠고 스튜디오가 성공가도를 달리고 있었기 때문에 제작 과정이 백설공주보다는 한결 수월했다고 알려져 있긴 하지만 까다로운 디즈니는 절반가량 완성된 영화를 전부 버리기도 했고 씬마다 진땀나는 논쟁과 논평 속에서 영화를 다듬기도 했습니다. 그런 그의 제작방식이 sweat box란 영화 용어로 재탄생하기도 했죠.

모든 게 거의 첫 시도였던 백설공주만큼은 아니지만 여전히 이 영화는 혁신적인 시도들로 가득차 있고 디즈니의 '완벽'에 대한 강박적인 집착 덕에 그것들은 이미 만들어짐과 동시에 거의 완성된 상태로 나올 수 있었습니다. 반드시 극에 필요하지는 않았지만 영화의 기술을 진일보시킨 장면들이 몇가지 있습니다.

가령 피노키오가 사는 마을을 훑어내는 두번째 시퀸스의 첫장면같은 경우가 대표적입니다. 디즈니는 '백설공주와 일곱 난장이'에서 실제적 원근감을 불어넣기 위해 멀티플레인 카메라 기법을 개발했는데 이 기법은 여러가지 배경 셀을 거리를 두고 배치한 후 카메라로 촬영해 2D 애니메이션에 깊이를 부여하는 기술입니다. 그런데 피노키오에서는 이 시스템을 다시 개조해 배경이 수평으로 이동하면서 카메라는 전진하는 방식을 가능케 했고 그 결과, 단순히 깊이를 부여하는 것 이상으로 마치 카메라가 하늘에서 내려와 마을을 구석구석 살피는 것같은 효과가 얻어진 것이죠. 덕분에 관객들은 마치 피노키오의 세계에 들어가는 듯한 기분을 느끼게 되었고요. 이 몇십초에 영화 제작비의 오분의 일 가량이 들어간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명장면인 최후의 대결(?) 씬)


애니메이션적인 것 뿐만 아니라 영화적인 구성에 있어서도 영화는 몹시 고민한 기색이 역력합니다. 조명과 카메라를 어떻게 사용해야 할지, 음악을 어떻게 이용해야 할지 세심한 연구의 흔적들이 묻어 있죠. 중요한 것은 애니메이션의 프레임은 일단 카메라를 틀면 무엇이든 나오게 되는 실사 영화와는 다르게 모든 것이 머릿 속에서 완벽하게 구상된 채 출발해야한다는 것이고 따라서 관객이 보는 화면은 모두 철저하게 작가의 의도를 내포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런 점을 정확히 인지한 피노키오는 극히 완성도 높은 화면 구성 연출을 보여주었고 관객을 극에 몰입시키는 다양한 영화적 연출기법들이 쓰였습니다. 피노키오가 죽는 장면도 그냥 넘어가지 않고 스냅줌으로 카메라를 빠르게 당겨 관객들의 충격을 유발한다거나 악당들을 표현할 때 조명을 아래에서 위로 비추는 고전적인 공포영화의 연출을 빌려오기도 합니다. 물론 손으로 그리는 애니메이션에 조명장치가 있을리 만무하니 모든걸 상상해서 그려야 하죠. 피노키오에서는 최초로 인형모델을 가져다 시점을 연구하는 방식이 도입되기도 했습니다. 현대에 모든 애니메이션이 쓰는 방법이지요.

(간접적으로 보여주는 고전 호러영화식 연출)

이런 영화의 기교들은 대개 스토리를 강화시키는 도구적 개념으로 활용되었습니다. 피노키오는 디즈니의 작가주의적인 면모가 가장 드러난 작품으로, 거의 모든 대상은 그의 이야기를 위해 자의적으로 활용되고 화풍도 백설공주에서의 사실주의를 버리고 시각적 편의를 고려한 인상주의를 채택했습니다.

이 작품은 디즈니 장편극으로는 드물게 삽화식 구성으로 만들어졌는데 이음새가 아주 좋지만은 않습니다. 가령 '기쁨의 섬'에서 온갖 고생을 하고 집에 돌아온 피노키오는 하늘에서 웬 비둘기가 가져다준 편지를 통해 제페토 할아버지가 고래 몬스트로에게 먹혔음을 알게됩니다.(전형적인 데우스 엑스 마키나입니다) 영화는 이렇게 거의 어떤 면에서는 상당히 제멋대로 이야기를 끌고 나가는데, 모든 요소가 관객의 극적흥분을 위해 철저하게 통제됩니다. 피노키오가 멀쩡하게 바다 속을 걸어다니는 씬을 보여줘놓고 막판에 익사해 죽는 것같은 옥의 티도 많지만 정말 놀랍게도 관객들은 그런 세부적인 디테일에 대해 거의 눈치챌 수가 없습니다. 워낙에 극의 몰입도가 높기 때문입니다. 관객들이 미묘한 작품 내부의 경계를 눈치채지 못하게끔 영화는 빠른 편집과 감정을 밀어붙이는 이야기로 우리의 감각을 붙들어 놓습니다. 

(기쁨의 섬에서 담배피우고 맥주를 마시다 당나귀가 될 뻔하는 피노키오)

피노키오 역시 원작과 달라지면서 관객입장에 놓인 캐릭터가 되었죠. 디즈니는 원작에선 오만한 불량소년이었던 피노키오를 순수한 어린이로 재구성합니다. 극은 그런 피노키오에게 끊임없는 시련과 고통을 제공하고 그 강도가 커지면서 관객과 피노키오와의 유대감도 강해집니다. 극적인 대비 효과를 위해 극을 최대한 어둡게 포장하면서 캐릭터는 밝고 명랑하게 유지시키는데 그 순수한 매력에 관객들이 몰입하기는 어렵지 않죠. 피노키오의 성격이 바뀌면서 원작의 계도적 분위기와 교훈적인 분위기는 줄어든 가운데 디즈니는 피노키오를 통해 아이의 순수함과 아이다움 그 자체에 대한 이야기를 늘어놓습니다. 주제가 바뀌면서 관객층도 자연스럽게 확장하게 되었죠. 사실상 디즈니가 살아 있을 때 그가 어린이들만을 위한 영화를 만든 적은 없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는 항상 관객을 위해 영화를 만들었을 뿐이죠.

영화에서 귀뚜라미 지미니도 중요한 캐릭터입니다. 원작에서는 피노키오가 자신에게 충고하는 귀뚜라미를 밟아 죽이지만(그 뒤로 귀뚜라미는 유령이 되어 피노키오에게 다시 나타납니다만) 디즈니 작품에서는 귀뚜라미 지미니가 피노키오의 양심의 상징이자 독자적인 성장 스토리를 지닌 주연 캐릭터로 등장합니다. 이 지미니는 프롤로그의 나레이션과 극에 코미디를 입혀 균형을 맞추는 역(comic relief),그리고 자기만의 스토리를 지닌 개별적인 캐릭터, 메세지를 전달하는 기능 모두를 담당하고 있죠. 평론가 레너드 마틴은 지미니가 애니메이션 사상 가장 중요한 조연이라고 하더군요.


(디즈니 영화 로고나올 때마다 나오는 노래)

한편 노래를 통해 극을 진행시키는 방식 또한 영화는 새로운 표준을 제공했습니다. 영화 자체가 노래로 뒤범벅되어 있는 것은 물론, 이런 노래들이 압축적으로 극에 대한 정보를 관객에게 제시하는 역할을 맡고 있고 또 매우 자연스럽게 삽입된 것이 특징입니다. 40년대 전통적인 브로드웨이극에서 잘 쓰는 방식인데 영화가 만들어진 것이 30년대 말의 일이니 그저 놀라울 따름이죠. 갖가지 시계소리와 주변음들이 뭉쳐 하나의 음악을 만들어내거나 음악을 통해 극의 구성을 액자식으로 형성하는 것 역시 인상적입니다. 피노키오는 디즈니 생전에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음악상과 주제가상을 같이 받은 두 작품 가운데 하나고(다른 하나는 메리 포핀스) 처음에는 백설공주보다 임팩트가 약하다는 평을 받았던 테마곡은 세월이 흘러 디즈니사의 로고송으로 채택되었습니다. 디즈니가 생전에 가장 좋아했던 곡도 영화의 주제곡 When You Wish Upon A Star라고 하지요.

불과 백설공주가 등장하기 전에는 누구도 애니메이션을 객석에 앉아 그렇게 오래 볼 수 있는 장르라고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색감이 너무 밝고 이전의 애니메이션들은 순간의 웃음을 유발하는데 치중했었기 때문이죠. 어떤 사람도 백설공주의 성공을 예상치 못했고 디즈니는 그런 사람들의 편견을 뒤집어 놓았습니다. 그리고 캐릭터들을 단순히 스크린 위에 불러와 생명을 불어넣는데 그치지 않고 정말 영화다운 영화를 고민하기 시작했던 것이죠. 선과 점의 결합인 '애니메이션'은 비로소 피노키오에 이르러 '영화'로 거듭나게 되었습니다.

 

+ 극중 등장하는 '기쁨의 섬'은 당시 열린 만국박람회의 패러디입니다.
+ 89년작 인어공주의 바다 표현은 피노키오에서 아이디어를 빌려온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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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글

  • tooksimi 2009/05/03 09:13 # 답글

    고래가 순순히 "불상한 사람들"을 놓아주지 않았군요...;; 심장이 조마조마하게 잘 보고 갑니다... 나이 드니... 제페토의 부성애가... 쨘~ 하게 다가오네요... 물론 노래도 좋구요~
  • jun Boy 2009/05/03 11:27 #

    막판에 제페토가 팔이 빠지게 노젓는 모습이 하이라이트죠 ㅎㅎ
  • 잠본이 2009/05/03 12:24 # 답글

    이렇게나 영화사적으로 중요한 작품이었을 줄은 미처 몰랐군요.
    그나저나 나무인형이 담배피우다 불씨가 몸에 떨어지면 어떻게 되는...(케켁)
  • jun Boy 2009/05/04 23:03 #

    비슷한 에피소드가 하나 있습니다. 불가지고 놀다가 손이 타서 제페토가 어항에다 집어넣어서 끄죠 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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