걸어도 걸어도 (2008)

초등학교 때는 걷기대회라는게 있어서 일년에 한번씩 하루종일 걷는 날이 있었습니다. 정해진 코스를 한바퀴 돌고나면 스탬프를 찍어주고 그렇게 정해진 양의 스탬프를 채우고 나면 끝이 나는 것이었는데 코스가 길고 지루해 걸어도 걸어도 도무지 끝이 보이지 않았던 기억이 납니다.
힘든 오르막길 다음에는 내리막길이 있었고 평지를 걷다 다시 오르막길을 만났습니다. 따뜻한 햇볕을 받던 피부는 시간이 가면서 그을러갔고 지나가는 풍경들은 계속 반복되어가면서도 그림자가 이동하듯 미묘하게 바뀌어 갔습니다. 쑤시는 다리를 매만지고 입에서 단내가 나는 고통을 감수하면서 계속 걸었던 데는 어쩌면 이유가 없습니다. 그냥 그렇게 하도록 정해졌기 때문이고 모두가 그러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영화 '걸어도 걸어도'는 어떤 가족의 이야기입니다. 걷는 장면이 많이도 나옵니다. 아버지의 산책길은 몇번이고 반복되지요. 때로는 누군가가 동반하고 때로는 혼자서 걷게됩니다. 오르막길은 힘들고 내리막길은 조심스럽습니다. 사람들의 그림자 뒤로 지나가는 빨간 기차와 멈춰있는 구름, 흘러가는 배와 바람결에 스치는 나무의 아련한 흔들거림. 자잘한 일상의 사소한 것들도 고스란히 생생한 것처럼 느껴집니다. 거기에 이야기의 흐름은 극적으로 높아지거나 낮아지지 않습니다. 영화는 참 고르고 조용하게 흘러가지요. 오죽했으면 옆 상영관의 트랜스포머의 기계 소리가 이 영화의 사운드보다 크게 들렸겠습니까.

이 영화도 오즈 야스지로의 가족극으로부터 자유롭지 않습니다. 가족극의 가장 미니멀한 단위를 제공했던 오즈 야스지로의 영화는 이 영화에도 생생하게 살아있고 감독 고레에다 히로카즈는 여기에 자신의 기억을 덧붙여 평범한 일상을 그야말로 복원하듯 살려냅니다. 해학이 살아있고 일상의 부조리함도 담겨 있습니다. 극도의 리얼리즘이 팽팽하게 관객을 긴장시킵니다. 영화는 어떤 사건을 보여주기보다 그 사건 이후의 이야기를 담고 있습니다.
장남 준페이의 기일을 맞이해 요코하마로 떨어져 사는 가족이 모여듭니다. 준페이는 바다에서 어떤 아이를 구하다 죽었고 그의 사진은 집에서 가장 좋은 구석을 차지하고 있습니다. 모두가 세월이 흘러 늙어가지만 사진 속의 준페이는 여전히 젊어보입니다. 살아있는 사람들은 결코 알 수 없는 죽은 이만의 무언가가 있는 모양입니다. 단지 우리가 알 수 있는 건 그 무언가가 살아있는 자들을 어떤 방식으로든 끌고가고 있다는 사실 뿐입니다.
그 세월이 깊어가도 거기서 패인 상처는 쉽게 아물지 않습니다. 어머니(기키 기린)는 담담한 일상을 품고 살다가도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행동을 하고 때로는 그녀의 친절은 섬뜩한 분노로 덮혀 있습니다. 딸 지나미(YOU)는 부모님과는 다른 본심으로 그들을 대하고 아들인 료타(아베 히로시)는 그저 이 알 수 없는 가족의 충동과 아버지의 그늘로부터 벗어나고 싶을 뿐입니다. 흘러간 세월 뒤에 남은 초라함과 자존감, 아들을 잃은 상처가 복잡하게 뒤엉켜 있는 아버지는 가족과 겉돌며 점점 멀어집니다. 갑자기 집에 흘러들어온 나비 한마리가 큰 소동을 일으킬만큼 이들은 겉으론 평범하지만 사실 금방이라도 터질듯한 암묵적이고 거대한 고통 속에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준페이에 대한 트라우마에서 비롯된 그 갈등은 가족에 대한 현대적이고 본질적인 문제들을 다루고 있습니다. 인물들의 사소한 말과 행동 속에서 가족의 정체성과 구성원 개인의 정체성은 끊임없이 충돌합니다. 해체되는 가정의 모습은 오즈 야스지로가 도쿄이야기를 만들던 오십여년 전이나 지금이나 별로 달라진게 없습니다. 단지 고레에다 히로카즈의 영화는 조금 더 부드럽게 그 구성원 개인을 껴안고 보듬어주고 있습니다.
인생은 끊임없이 걷게 되어 있습니다. 걸어도 걸어도 끝이 보이지 않고 그 끝도 무척 갑작스럽게 찾아옵니다. 거기서 우리는 늘 실수를 저지르고 상처받고 아파하며 후회도 하지만 다시 실수를 반복하고 삶은 되풀이됩니다. 그런 상황은 내 인생 뿐만 아니라 다른 이의 인생 속에도 있는 것입다. 어쩌면 그런 근본적인 불안과 당혹감을 가지고 태어나 평생을 고통받으며 살아가도 우리가 괜찮을 수 있는 것은 그냥 그렇게 하도록 정해졌고 모두가 그러고 있기 때문일지도 모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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