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트 디즈니의 피터 팬 1화 디즈니 리뷰

피터 팬 Peter Pan (1952)

1화 비비디 바비디 부


'밤비'의 개봉 직후 월트의 주변에는 달갑지 않은 먹구름이 잔뜩 몰려들었다. 늘 가족같다고 자랑했던 애니메이터들의 파업, 전쟁이라는 시대적 상황 그리고 상업적인 실패. 무엇보다도 만드는 영화마다 평가가 형편없었다. 물론 여전히 찬사를 보내는 시선도 많았고 그가 인기가 많은 유명인사라는 사실도 쉽게 변하지는 않았다. 남미에서는 디즈니의 인기가 폭발적으로 증가해서 그가 남미를 소재로 만든 애니메이션 Saludos Amigos(라틴 아메리카의 밤)가 남미의 여러 국가에서 하루 종일 스크린에 걸리기도 했다. 그러나 혹독한 평가와 부정적인 인식이 그보다 우세했다.

한 때는 월트가 미국 문화를 예술의 한가지 형태로 전세계에 전파하는 장인 대접을 받던 시절도 있었다. 그러나 어느 순간부터 그런 호의는 고전을 제멋대로 고치고 잡탕찌개처럼 만든다는 문화 사냥꾼이란 비아냥으로 슬며시 바뀌어 버렸다. '환타지아'에서는 잘난 척을 한다며 욕을 먹었고 '밤비'는 디즈니의 마법이 완전히 사라진 것이 아니냐고 평받았다. 오히려 호평을 받았던 선전 영화 '공군력을 통해 이기자'는 시대가 지난 후 완전히 잊혀졌다. 그 영화는 선전 영화들의 집단적 광기를 설명하는 한가지 증표로나 기억될 뿐이었다.

Saludos Amigos


밤비도 관객들의 심심한 반응으로 일관되기는 마찬가지였다. 무엇보다도 이 영화가 주목받지 못한 것은 초기 개봉 스케줄에 비해 지나치게 시간을 잡아먹고 뒤늦게 개봉된 탓이 컸다. 사람들이 영화 자체에 크게 관심을 가지지 않았던 것이다. 오히려 영화가 화제가 된 것은 월트와 잡지 '아웃도어 라이프'(사냥에 대한 것을 주로 다루는)의 편집장 사이에 벌어진 논쟁이었다. 밤비가 과연 사냥꾼의 명예를 모독했는지 안했는지에 대한 시끄러운 소동이 신문을 채웠다. 요즘으로 치면 디워 논쟁 쯤 되는 이 의미없는 싸움은 영화가 잠시 동안 반짝 흥행하는데 도움을 주긴 했지만 전체적으로는 본전치기에 도움을 줄 정도까진 아니었다.

상황이 이렇다보니 월트는 자연스럽게 애니메이션에서 멀어지기 시작했다. 예전같으면 프레임 하나하나를 점검하는데 시간을 보냈지만 이제는 애니메이터들에게 전적으로 맡겨두는 일이 늘어났다. 동시에 반공산주의자, 나쁜 자본가, 인종차별주의자등 온갖 안좋은 꼬리표만 들러붙기 시작했다. 46년에 개봉한 실사와 애니메이션을 교차 편집한 영화 '남부의 노래'에서는 인종차별 텍스트로 곤혹을 치렀다.(이 영화는 심지어 그 이유로 아직까지도 미국에 서 비디오나 DVD가 나오지 않고 있다. 유럽과 일본에서는 발매되었다.) 흑인들이 피켓을 들고 영화관 앞에서 시위를 벌였다. 영화에서 흑인들이 거대한 부를 누리는 백인 가정을 행복하게 떠받드는 묘사가 들어있었기 때문이었다. 물론 그 영화의 무신경함때문에 월트가 인종차별주의로 비판받을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영화의 주인공인 흑인 역을 맡았던 제임스 베스켓과 월트는 굉장히 친한 사이였고 월트가 아카데미 협회에 열렬하게 구애함으로써 47년 20회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제임스 베스킷은 명예상을 받을 수 있었다. 그것은 처음으로 흑인배우가 수상한 오스카 트로피였다.

아카데미상을 받는 James Baskett


이 무렵 디즈니의 불편한 심사는 그의 스타일 변화에도 영향을 끼쳤다. 40년대 중반 초현실주의 화가 살바도르 달리와의 합작도 그 중 하나였다. 디즈니는 사실 순수 화가로서 기억되지는 않지만 그래도 미술 쪽에 강한 인연을 가지고 있었던 것은 사실이었고 40년대 초에는 뉴욕 현대 미술관의 이사직을 맡기도 했었다. 달리와 쉽게 작업을 할 수 있었던 것도 그런 배경이 깔려 있었기 때문이었다.  달리와 만나면서 월트는 그때까지 고집스럽게 유지해오던 외적인 리얼리즘을 버리기 시작했다. 실제로 달리와 함께 제작하던 '데스티노'는 재정난으로 완성되지 못했지만-2003년에 디즈니의 조카 로이 디즈니가 다시 작업해서 완성시켰다 여기를 참조- 이때를 기점으로 디즈니는 좀 더 내면적인 것에 관심을 가지고 미니멀리즘과 단순한 형식미에 몰두하기도 했다. 당시 유행하던 현대 미술 붐에 동참하기로 한 것이었다. 그러나 이미 미술쪽에서 월트에 대한 평은 박할 따름이었고 중단된 것은 달리와의 작업 뿐만이 아니었다. 이 당시 디즈니에는 재미있는 기획도 많이 있었다. 히치콕과의 협연, 에드가 앨런 포 소설의 애니메이션화, 슬리피 할로우 애니메이션 그리고 징글맞게 시간을 끌어오던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 (제작기간으로는 디즈니 내에서 최장기간을 소모했다) 등등. 그러나 많은 계획들이 자금난으로 인해 날아가거나 아주 뒤늦게 완성되었다.

그러나 이 시기에 월트의 이미지가 부정적으로 달라지기도 했을 지언정 그가 여전히 미국 대중문화의 아이콘이란 사실은 변하지 않았고 오히려 더 확고해졌다. 거기에는 상업적이고 보수적인 빛이 만연했다. 실제로 월트의 나이가 사십대 중반을 넘어서기도 했고 예전의 활기차고 재기발랄한 면은 작품에서나 개인적으로나 완연하게 퇴색해가고 있었다. 작품의 오락적인 요소와 상업적 성공에 예민해 진 것도 사실이었다. 월트는 실패를 연이어 낸 장편 애니메이션보다 흥행이 되는 상업영화를 잇달아 만들었고 '보물섬'같은 히트작을 내기도 했다.

디즈니 최고 히트작 중 하나인 신데렐라


그러나 장편 애니메이션에 대한 희망이 완전히 사그라든 것은 아니었다. '환타지아'와 같은 형식으로 제작한 열번째 장편 애니메이션 '멜로디 타임'의 실패 직후에도 월트는 여전히 백설공주같은 기적을 갈구했다. 신데렐라가 그 공백을 메꿀 수 있을 것이란 확신은 어느덧 종교적 믿음이 되었다. 정말로 디즈니 스튜디오는 신데렐라에 사활을 걸었고 월트는 이 영화가 망하면 회사는 끝장이라며 신경을 곤두세웠다. 그 말은 사실이었다. 영화는 이백만불이 훌적 넘는 많은 제작비를 쓰고 있었고 여전히 재정적인 상황은 좋질 못했다. 월트는 스튜디오를 파는 것가지 고려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게다가 다른 문제들도 많았다. 재정위기로 인한 잇다른 해고로 인해 애니메이터 인력에서 디즈니는 예전처럼 강력한 힘을 가지고 있지 않았고 실제로 완성된 신데렐라도 월트의 마음에는 영 성에 차지 않는 모양새였다. 그의 마음 속에서 신데렐라는 실은 실험성은 완전히 죽고 가장 편한 길만 골라간 대중 영화였을 따름이었다.  실제 배우의 연기를 따다 그림을 그리는 로토스코핑을 이용해 최대한 실사에 가깝게 영화를 만들었고 최대한 평면적이고 플롯도 단순하고 코믹하게 구성하는 안정된 방식을 추구했다.

그런데 그렇게 만들어진 영화는 정작 완성도에 시큰둥했던 월트를 민망하게 할 정도로 크게 성공했다. 밤비 이후로 정식으로 제작된 첫 장편 애니메이션이었던 신데렐라는 정말로 흥행에 크게 성공했을 뿐더러 '덤보' 이후로 호평받은 유일한 디즈니 애니메이션이 되었다. 영화는 흥행에서만 800만불을 거두어들였고 특히 관련상품에서의 수익이 폭발적으로 증가했다. 영화의 히트곡 '비비디 바비디 부'는 는 그 주문이 상징하는 것처럼 완전히 바닥까지 내려갔던 디즈니를 구원했다. 극단의 외줄타기를 반복하는 인생에서 월트가 완벽한 자신의 세계, 자신의 꿈이 모두 구현된 단 하나의 세계를 강하게 원하게 된 것도 바로 그 때였다. <계속>




두번째 에피소드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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