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즈니랜드와 미국의 신화 2화 디즈니 리뷰

디즈니랜드와 미국의 신화

2화 월트 디즈니 아저씨


1950년대는 텔레비전의 시대였다. 30년대 미국에서 출현한 이 새로운 매체는 50년대에 들어서며 미국 전역에 걸쳐 엄청난 보급률을 확보하게 되었다. 독일의 비평가 벤야민은 새로운 미디어의 등장이 비로소 대중을 하나의 정치적 집단으로 묶어 권력을 분산시킬 수 있음을 내다보고 환호했지만 귄터 안더스는 텔레비전을 키고 감상한 몇 분만에 인간이 미디어의 노예가 되고 그것을 무분별하게 수용하게 될 것이라 예언했다.

뭐가 어찌되었건 헐리우드에서 텔레비전은 결코 간과할 수 없는 골칫덩이였다. 당시 영화 스튜디오는 텔레비전이 미디어의 지배권을 빼앗아가지 않을까 노심초사 중이었고 실제로도 그랬다. 가로비율이 세로비율에 비해 월등히 높은 시네마스코프같은 실험적인 시도는 텔레비전을 견제하기 위한 영화업계의 최후의 발악같은 것이었다. 그러나 헐리우드에서도 월트 디즈니만은 유독 텔레비전에 우호적이었고 실제로 메이저 스튜디오 가운데 가장 먼저 텔레비전과 손을 잡은 회사가 디즈니였다. 월트는 외려 텔레비전이 저질영화를 내쫓고 영화업계의 경쟁력을 더 높여줄 것임을 내심 기대했다. 대체로 우수한 영화를 내놓았던 스튜디오의 수장으로서 충분히 할 수 있는 생각이었다. 동시에 프로그램 제작의 광고수입으로 밑빠진 독처럼 엄청난 돈을 쓰던 영화 산업의 뒤를 대줄 수도 있을 것이라 생각했다. 그러나 그가 텔레비전에 걸었던 가장 큰 기대는 그 놀라운 대중적 파급력이었으리라.

56년 디즈니랜드


애초에 스튜디오 근처 버뱅크에 지을 예정이었던 디즈니랜드는 도시의 고즈넉함을 망칠 수 있다는 버뱅크 시의회의 반대로 다른 부지를 필요로 하게 되었다. 작은 마을 형식으로 구성되었던 디즈니랜드는 본격적인 계획이 진행되면서 계획이 지나치게 거창해지고 있었다. 관객들이 공원에 들어서면 가장 먼저 만나게 되는 메인 스트리트를 중심으로 공원이 4개의 구역으로 나뉘게 설계되어 있었고 그를 위해 40만평이상의 부지가 필요하다고 월트가 직원들에게 말했다. 적당한 부지를 찾는데 고용된 스탠퍼드 연구소의 조사원들이 나서서 고르고 또 고른 장소는 오렌지 농장 부지로 사용되던 애너하임의 넓은 부지였다. 당시 그 부지 근처에는 거주하는 주민들의 수도 아주 적어 땅의 매매도 비교적 쉽게 이루어질 수 있었다. 이미 75만불 이상이 부지를 구입하는데 지출되었고 월트도 기획비에만 사비 15만불을 밀어넣었다. 이때까지 예상되던 공원의 총 제작비는 600만불 가량에 육박했다. 텔레비전의 도움은 절실했다.

방송국에 내보낼 프로그램의 컨셉 제작에 착수한 월트는 광고주들에게 테마파크의 지분을 부여하는 식으로 공원에 댈 돈을 마련할 계획을 세웠다. 그러나 프로그램 편성에 대한 방송사들의 태도는 심히 회의적이었다. 영화업계에서 왕따가 될 각오로 텔레비전과 손을 잡겠다던 월트로선 심히 당혹스럽지 않을 수 없었는데 이때 월트와 함께 작업하겠다고 나선 것이 훗날 디즈니사에게 인수된 ABC(미국방송) 방송국이었다. 처음엔 ABC도 다른 방송사와 마찬가지로 월트가 제작하는 프로그램의 편성에 대해 삐딱하게 나오긴 했다. 그러나 당시 ABC는 여러 개의 방송사 가운데 시청률 경쟁에서 뒤진 채 하위권의 늪에서 헤어나오지 못하던 터였다. 그들에게는 가족층을 공략할 결정적인 텔레비전 프로그램이 필요했고 월트는 그 유일한 적임자였다. ABC가 50만불의 투자와 450만불의 보증, 수백만불의 만기 채권 구입등을 부담하고 월트가 방송사에 프로그램을 제작하기로 하면서 마침내 계약은 이루어졌다. 일단 방송사의 투자가 이루어지면서 후발주자들의 투자도 뒤따라왔고 그들은 투자한만큼의 지분을 얻어 돌아갔다.



54년도에 방송한 첫회. 66년 사망전까지 디즈니가 계속 진행했다.

디즈니가 ABC에 대는 프로그램은 사실 졸속으로 이루어진 짜집기 방송이었다. 프로그램은 디즈니랜드를 홍보하기 위한 프로그램으로 제목도 '디즈니랜드'였고 월트가 직접 출연해 디즈니랜드 건설에 대한 이런저런 이야기를 들려준 다음 디즈니 영화의 비하인드 스토리 그리고 기존에 만들어 놓은 애니메이션 필름과 실사 영화 일부의 재밌는 장면을 버무려서 만든 것이었다. 아무튼 이렇게 대충 만든 프로그램이었음에도 이 '디즈니랜드'는 미국 방송 역사에 남을 대성공을 거둔다. 시청률은 약 21화가량으로 구성된 첫 시즌(아직까지 방송하는 미국 최장수 프로그램중 하나다)이 모두 50%에 육박했고 ABC의 광고수익의 대부분을 디즈니랜드가 채웠다.

그러나 가장 성공적이었던 것은 바로 월트 디즈니 자신이었다. 이 프로그램의 공식적인 진행자같은 존재였던 그는 전국구적인 스타가 되었다. 사실 이전까지도 월트는 이름이 유명하긴 했어도 그의 얼굴까지 잘 알려진 편은 아니었다. 그러나 텔레비전은 그를 완벽하게 하나의 상징적인 이미지로 재창조했고 연예인으로 만들어주었다. 그는 텔레비전 속에서 호기심많고 친절하고 배려깊고 유머러스한, 요즘으로 치자면 오프라 윈프리같은 이미지였고 아마 그보다 더 친근하게 여겨졌을 것이다. 디즈니랜드의 성공은 그 자신의 이미지에 막대한 환상을 불어넣는데 일조했고 월트 자신이 불편해할 정도로 환상은 거대해졌다. 타임지는 백설공주의 개봉때 이후로 마침내 두번째로 월트의 사진을 표지에 올렸다. Uncle Walt (월트 아저씨)란 별명이 이때 생겼고 이런 열띤 반응은 사실 이즈음 들어 월트 디즈니에 대한 사회적 평가를 극명하게 나누는데 일조했다. 누군가는 월트 아저씨의 포근한 기억 속에서 그의 세계와 환상적 이미지를 전적으로 지지했고 한편에선 미국보다 더 미국같은, 그러나 철저하게 허상의 이미지로 주조된 미국의 상징으로서 디즈니를 보았다. 후자에 속한 사람들에게 월트 디즈니의 이미지란 탐욕을 숨긴 강대국의 위선과 허상에 지나지 않았다. 그러나 전쟁 이후 정신적 공황을 물질적 욕망와 보수적이고 안정적인 색체로 메우고 싶었던 당대의 미국은 바로 그런 욕망이 상징화된 디즈니라는 텍스트에 열광했다. 

스튜디오가 제작한 조로 시리즈에 대해 설명 중.

방송 프로그램으로 인한 디즈니랜드의 홍보효과는 대단했다. 공사가 완성되기 전에만 매주 주말마다 공사현장을 보려고 수만명의 사람들이 몰려들었다. 그렇지만 그런 관심이 공원 제작비를 온전히 메꿔주지는 못했다. 공원의 돈줄을 위한 추가적인 아이디어가 곳곳에서 나왔다. 공원내 상점에 대한 장기 임대차 계약과 각각의 탈것(어트랙션)에 대한 기업의 후원 등으로 월트는 일단 개장을 1년을 앞두고 바쁘게 공사를 진행하기 시작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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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글

  • 와우 2009/09/19 07:50 # 삭제 답글

    잘읽었습니다 2부기대됩니다 ㅋ
  • 지나가다 2009/09/19 11:28 # 삭제 답글

    시대와 맞물려 재밌는 이야기가 펼쳐 지는군요. 잘 읽었습니다.
  • 아홉살인생 2009/09/19 13:56 # 삭제 답글

    디즈니랜드를 가 본 사람 얘기가 정말 대단하다고 하더군요. 어릴때부터 이런곳을 보고 경험하고 자란 아이들과 그렇지 못한 나라의 아이들이 성인이 되었을때 그 상상력의 차이는 어떨까하는 생각을 했다고 하더군요. 아울러 정말 미 상업주의의 극치를 보여주는것 같았다고도 ....

    오늘도 잘 읽었습니다. 다음편도 기대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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