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즈니랜드와 미국의 신화

3화 미국인으로서의 월트 디즈니
TV 쇼 '디즈니랜드'의 인기로 월트 디즈니는 '백설공주' 개봉 이후 처음으로 타임지의 표지모델로 등장하는 영광을 누렸다. 디즈니의 텔레비전 진출은 무척 성공적이었다. 최초의 텔레비전 미니시리즈 '데이비 크로켓'은 그 드라마에 나온 너구리 모자를 천만개 이상 팔 정도로 전국적인 인기를 끌었다. 데이비 크로켓은 미국의 전설적인 개척자로 유명한 민중 영웅 가운데 한 사람이다. (소작농으로 살다 인디언 전쟁에 참여한 것을 계기로 유명해져 나중에 하원의원으로까지 성공대로를 밟다 알라모 전투에서 사망한 전형적인 개척 영웅.) 월트가 데이비 크로켓이란 인물을 발굴하고, 그 인물의 낙천적이고 다분히 미국적인 가치를 재조명한 드라마가 커다란 인기를 끈 것은 당시 미국의 어떤 열망을 반영하는 것이었다.

전쟁이 끝나고 경제적 호황기를 맞이했음에도 여전히 미국 사회에는 냉전의 싸늘한 기운과 위기의식이 넘쳐흘렀다. 사회학자 닐 개블러는 미국이 라이벌 소련에 대해 자신들의 우위를 증명해 줄 가상의 민족 영웅이 필요했고 데이비 크로켓의 폭발적 인기는 텔레비전이란 전국적인 위력을 가진 매체가 이런 사회적인 열망과 만나 만들어낸 기이한 현상이었다고 지적한다. 그 인물이 가진 어두운 면은 사라지고 당시 미국인들이 사랑해마지 않는 보수적인 가치와 낙천적임, 오락만 남았다. 아마도 그게 필요한 시기였기 때문일 것이다. 또 이런 애국주의는 매카시즘의 상처를 어루만질 대안이기도 했다. 52년 조지프 매카시가 "미국에선 공산주의자들이 활동하고 있고 나는 297명의 공산주의자 명단을 갖고 있다."고 주장하면서 미국에는 반공주의 광풍이 일어났고 거기에서 돌이킬 수 없는 상처가 생겼다. 누군가는 떠났고 누군가는 거기에 앞장선 혐의로 죄의식에 시달렸다. 데이비 크로켓과 월트 디즈니는 그런 상처를 감출 수 있는 대안이었고 그것은 대중문화가 가진 얄팍하고 위험한 속성과 맞닿아 있기도 했다. 월트 디즈니는 데이비 크로켓 시리즈와 텔레비전 출연를 통해 이때쯤 가장 미국적인 가치를 가진 인물로서 대두되었고, 폭넓은 미국 대중의 지지를 얻어내는데 성공했다. 대통령 산하 교육의원회의 일원이 될 정도로(금방 관두었지만) 그의 이미지는 다름아닌 미국 그 자체였다.
어쨌거나 텔레비전 진출에서의 성공은 개장을 앞둔 디즈니랜드에 커다란 홍보가 되었다. 그러나 아무런 문제가 생기지 않은 것도 아니었다. 디즈니는 이 무렵에 당시 디즈니 영화들을 배급하던 RKO와 갈등을 겪고 있었다. 텔레비전이 전국적으로 보급된 이후에 가장 타격을 받은 것은 단편 영화였는데 RKO에서 디즈니의 단편영화 배급을 주저하면서 불편한 관계가 표면화되었다. 당시 RKO는 이미 흔들거리고 불안하기 짝이없는 회사였다. 영화 '에비에이터'로도 다뤄진 헐리우드의 유명한 억만장자 하워드 휴즈-때마침 이때부터 그의 기행도 시작되었는데-가 40년대 말에 RKO를 사고 그 기업을 전부 망가뜨려놓았기 때문이었다. 휴즈는 망신창이가 된 회사를 월트에게 떠넘기려고 했지만(둘의 스타일은 꽤나 비슷했다) 월트는 거절했고 결국 다른 이들이 가져갔다. 어찌되었건 RKO의 늘어가는 부채나 미적지근한 홍보, 다른 여러 이유를 들어 디즈니는 그 관계를 청산하고 스튜디오 앞의 거리명을 따 독자적인 배급사를 만든다. 그것이 지금의 '브에나 비스타'다.

이렇게 정신없이 일들이 벌어지는 와중에도 월트는 오로지 공원에만 관심을 쏟았다. 이미 공원에 투입된 비용은 당초 600만불을 한참 벗어나 1700만불에 근접하고 있었다. 그러고도 돈이나 시간이 너무 모잘랐고 사건은 줄줄이 터졌다. 아스팔트를 공급하던 공장에서 파업이 나고 여러 노동 조합의 인부들이 서로 한 공사판에 모여들면서 싸움도 곧잘 일어났다. 결국 몇 가지 일들은 마무리 되지 못한 채 개장일을 만나고야 말았다. 가령 배를 타고 디즈니 애니메이션을 미니어처로 만든 것을 둘러보게 만들 예정이었던 '스토리북 랜드 커널 보트'란 어트랙션은 결국 돈이 부족해서 미니어처가 들어설 자리에 공원 근처의 잡초들을 뽑아다 늘어놓을 수 밖에 없었다. 월트는 계획이 뜻대로 흘러가지 않는 와중에도 그 잡초들 앞에 표지판을 두고 가짜 학명을 붙이자는 꾀를 내었다. 잡초들은 순식간에 희귀하고 진귀한 식물들로 둔갑했다.
사실 디즈니랜드의 많은 것이 그런 허구의 것이었다. 애초에 거대한 무대처럼 설계되기도 했다. 참여한 아티스트 대부분이 영화판에서 일하던 사람들이었고 그들은 눈속임의 달인이었다. 월트는 디즈니랜드의 사물이 의도적으로 현실보다 작게 만들어져서 사람들이 장난감같다는 생각을 하도록 해야한다고 했다. 실제로 거리에 따라 비율이 다르게 책정되기도 했다. 1층은 현실세계 건물 1층의 1/10로 2층은 더 작게, 그래서 사람들이 의식적으로 자신이 거대해보이고 그것들을 소유한 것처럼 느끼게 만들어졌다. 디즈니랜드의 건물들은 사물을 거대하게 만들어 숭고함을 느끼게 하던 2차대전 시대의 파시즘 건축과 완벽하게 역행했다. 디즈니랜드의 주인은 건물이 아닌 인간이었다.

동시에 월트는 늘 그 자신을 괴롭혀온 '현재'라는 시간적 흐름을 거세했다. 공원 전체에 담을 세워 밖이 보이지 않게 설계하려고 했고 실제로 공원 안에서는 어느 위치에서나 밖이 보이지 않아 오로지 공원의 것들만 볼 수 있도록 완성되었다. 모든 것은 월트 디즈니, 자신의 삶과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었다. 어린 시절의 추억이 깃든 마셀린을 형상화한 도시 '메인 스트리트'를 지나 관객들은 선택의 순간을 만난다. 개척영웅들이 모여드는 '프론티어 랜드' 그리고 애니메이션의 공간인 '판타지 랜드'와 '투머로우 랜드'까지 현실에는 없는 모험과 낭만과 허구로 세워진 거대한 세계들이 나란히 공존한다. 그 세계의 무대에는 배우도 필요했다. 월트는 공원에서 일할 직원들을 고용하면서 그들에게 배우처럼 행동하라고 부탁했다. 디즈니랜드가 무대이고 거기서 일하는 직원들은 마치 청소부인듯, 안내원인듯 연기를 하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실제로 그 후로 디즈니랜드의 직원들은 Cast(배역)이라고 불리게 되었다. 모든 것이 인위적이고 갈끔하게 완성된 완벽주의자의 완벽한 세계. 그리고 마침내 사상 최악의 아수라장이 된 개장일이 다가왔다. <계속>




덧글
안도류 2009/10/30 12:10 # 삭제 답글
항상 감사하게 잘 읽고 있습니다. ^^얼마전 "백투더퓨처"를 우연히 다시보게 되었는데
주인공 마티가 과거(30년전이니 1955년?)로 돌아가서 엄마네 집에 잠시 머무르게 되었을 때
엄마의 어린 동생(그러니까 외삼촌인가)이 저 너구리 모자를 쓰고 있더군요.
생각해보니, 말씀하신대로 저 때 '데이빗 크로켓'이 엄청 인기를 끌고 있을 때라는
시대 배경을 설명해 주는 장치였구나, 싶더군요.
역시 아는만큼 보이나봐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