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7화 실패와 도전
월트는 수완이 좋았고 투자자를 잘 끌어모았다. 애니메이션 이전에 어쩌면 그를 가장 돋보이게 만든 것은 탁월한 사업가적 자질이었다. 남을 설득하는데 귀재였고 자신의 비전을 들려주면 듣는 이들의 머릿 속으로 같은 꿈이 흘러갔다. 대개 그를 믿는 열성적인 투자자들은 쉽게 그에게서 발을 돌리지 않았고 그게 그가 몇번의 파산의 위기를 겪고도 다시 일어났던 비결이기도 했다.
그렇지만 아직 풋내기에 불과한 월트가 자신의 첫 애니메이션 스튜디오를 꾸려가기는 쉽지 않았다. 돈이 부족하자 군대에서 걸린 결핵으로 인해 생의 마지막 순간을 준비하던 그의 형 로이 디즈니가 연금에서 일부를 떼어 투자하기도 했다. 그러나 실제로는 투자금을 모으는 것보다는 일거리가 없는게 더 큰 문제였다. 애초에 애니메이션이란 장르가 제대로 정착하지 않은 상태에서 그들과 계약을 맺을 배급사는 없었다. 20년대에 애니메이션의 위치는 장편 영화의 상영 중간중간에 틀어주는 소품같은 개념일 뿐이었다. 그마저도 뉴스나 라이브 코미디의 자리 경쟁으로 애니메이션이 발 붙일 공간는 몹시 비좁았다.
간신히 몇 개의 형편없고 일방적인 계약을 따낸 이후에도 래프-오-그램 스튜디오의 재정은 나아질 기미가 추호도 보이지 않았다. 그런 와중에도 계약을 따낸데 기뻐했던 월트는 의기양양해서 아직 회사에서 일을 하고있던 어브 아이웍스도 스튜디오로 끌어들였다. 비좁은 살림과 주급이 밀린 애니메이터들 그리고 아직 생성되지도 않은 시장이 뒤에 떡 버티고 있었지만 분위기만큼은 최상이었던 것 같다. 월트의 오랜 친구이자 스튜디오의 일원이었던 월트 파이퍼는 스튜디오가 돈을 벌기보다는 놀이터에 가까웠다고 그 시절을 회상했다. 그들은 남는 시간에는 건물 옥상에 올라가 카메라로 영화를 찍고 재미있는 소재거리나 코미디에 대한 이야기를 함께 나누며 시간을 보냈다. 그러나 그런 와중에도 스튜디오는 매주 4천불이상의 적자를 내고 있었다. 초기 투자금이 만 오천불이었고 애니메이션에 대해서는 잘 알지도 못하는 풋내기들이 모여 일하는데다가 계약은 손에 꼽을 정도였으니 제대로 굴러갈리가 없었다. 설상가상으로 배급계약을 맺었던 테네시주의 픽토리얼 클럽이 파산을 선고했다. 다급해진 월트는 일의 범위를 확장해 아동용 사진을 찍는다거나 영사 사업도 함께 한다는 등 긴급 처방용 광고도 붙여야 했다. 그러나 결국 사무실 임대료도 내지 못하는 상황에 이르렀고 길거리에 떨어진 지폐를 주을 때나 밥을 맘놓고 먹을 정도였다.

최악의 상황에 이르고 있었지만 발벗고 가만히 있을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월트는 스튜디오의 상황으로는 다소 무리였지만 실사영화와 애니메이션을 합성시킨 작품을 만들려고 준비중이었고 이것이 배급사의 관심을 끌어모으는데 성공했다. 애니메이션 뽀빠이를 제작한 막스 플라이셔가 만든 만화의 캐릭터들과 실사 배경을 합성한 영화 '아웃 오브 디 잉크웰'의 영향을 받은 것이었다. 대신 월트는 이를 뒤집어 실사 배우가 애니메이션 배경에 나오는 방식을 선택했다. 그는 보수를 지급하지 못하는 대신 영화 총 수익의 5%를 제공하겠다는 계약 조건으로 한 소녀를 캐스팅해서 그녀의 집에서 영화를 찍었다. 그것이 바로 '앨리스 코미디 시리즈 '의 첫탄으로 그 주인공이었던 버지니아 데이비스는 후에 20년대 헐리우드의 최고 아역스타중 한사람이 되었고 바로 올해까지 살다 지난 8월 15일에 90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앨리스 코미디 시리즈의 첫 편이었던 '앨리스의 이상한 나라(Alice's Wonderland)'의 제작은 험난했다. 촬영 도중에는 급기야 임대료가 잔뜩 밀려있던 사무실에서 쫓겨나 옆건물로 허겁지겁 장비와 자료들을 옮겨야 했다. 직원들은 상당수가 그만두었고 어브 아이웍스와 월트 파이퍼마저 주급이 제대로 지불되지 않자 회사를 떠났다. 사실상 거의 세네명이 남은 스튜디오에서 밥까지 굶어가며 찍은 작품이었고 끝내는 앨리스 시리즈의 판권마저 담보로 넘길 정도였다. 스튜디오는 문을 연 이래로 빚에 둘러쌓여 헤어나오질 못했고 그 절정에 다다르고 있었다. 월트의 삼촌은 월트보고 살 수 있는 길은 캔자스 시티를 떠나는 길밖에는 없다고 강한 충고를 던지기도 했다. 월트 역시 결국 그 모든 것을 감당못하고 파산선고를 해버렸다. 그나마 한가지 품던 희망이던 앨리스의 이상한 나라마저 제 기를 펴지도 못하고 실패했다. 월트는 당시 스물 한살이었는데 겉으론 여전히 활기넘치고 의기양양했지만 속으로는 뼈아픈 실패의 고통으로 괴로워 하고 있었다. 월트 디즈니는 겉으로는 아닌 척했지만 처음 겪은 실패가 완전한 패배감을 주었고 다른 사람들을 실망시키고 돈을 날리게 된 것이 비참했다고 시간이 지난 후에 토로했다.
앨리스 코미디 중 한편 1925년작
그렇지만 다시 시작해야했고 그럴 수 있었다. 직원들도 다 떠나고 스튜디오는 망했지만 그 자신은 건재했고 그의 작품들은 돈벌이는 되지 않았지만 배급사가 꽤 탐낼만한 매력이 있었다. 믿고 지지해준 투자자들이 꽤나 인심이 좋았는지 월트가 캘리포니아에서 더 잘할 수 있을 것이라 격려해주기도 했다. 월트가 부랴부랴 급전을 마련해 조금씩 갚긴 했지만 터무니없이 갚은 돈이 적었던 상황에서 몇몇은 나중에 갚아도 된다고 말했고 실제로 결국 그들이 말한대로 이루어졌다. 월트는 병에서 회복중인 형 로이가 있는 헐리우드에서 다시 출발해보기로 했다. 20년대 헐리우드의 가능성은 지금보다도 더 충만한 것이었다. 유일한 오락거리이던 영화를 매주 전 미국인의 삼분의 일 이상이 보고 있었다. 성공에 대한 강력한 열망과 어떤 오락적이고 낙관적인 분위기가 결합된 당시의 헐리우드는 꿈틀거리는 신화의 뿌리가 자리잡을 최상의 공간이었다. 당시 헐리우드에서 진공청소기를 파는 일을 하고 있던 형 로이가 월트를 맞이했다. 디즈니 브라더스 스튜디오가 탄생하기 몇달 전의 일이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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