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이디와 트램프 Lady and the Tramp (1955)

애니메이션이 가장 빛나는 순간중 하나가 바로 동물을 다룰 때가 아닐까 싶습니다. 표현의 측면에서 실사 영화가 가지는 한계를 가장 쉽게 건너 뛸 수 있기 때문이죠. 동물 다큐멘터리가 편집으로 이야기를 만든다면 애니메이션 속 동물은 그들의 생김새에 이미 이야기를 담고 있고, 또 인간에 비하면 캐릭터로 만들기도 쉽습니다. 최근 컴퓨터 그래픽 애니메이션들이 등장하고 기술적으로 인간표현의 어려움에 봉착하면서 동물들은 만화의 주인공으로 더 각광받게 되었지요.
대개 애니메이션의 동물들은 인간을 대신하는 은유적인 표현으로 쓰여 왔습니다. 조지오웰의 동물농장을 애니메이션화시킨 작품이나 워너 브라더스의 벅스버니같은 작품들은 동물의 개별적 특성은 최소한만 남기고 그들에게 어떤 인간사회의 단면이나 인간적 특성을 대입시켜서 그 날카로운 풍자의 즐거움을 누려왔죠.
디즈니의 15번째 장편 애니메이션 레이디 앤 트램프는 디즈니가 오랜만에 만들어낸 동물중심의 영화입니다. 일단 이 작품은 개에 대한 존중과 근본적인 애정이 가득합니다. 개를 중심으로 돌아가는 작품이고, 실제로 영화는 세상을 살아가는 수많은 개들에게 헌사되기도 했습니다. 재밌는 건 영화에 적용된 새로운 기술마저 자그마한 동물들을 위한 것이라는 겁니다. 영화는 애니메이션으로는 최초로 시네마스코프 비율을 적용한 영화입니다. 그래서 스크린의 가로길이가 세로보다 2.66배가 넓습니다. 굉장히 와이드한 화면이죠. 본래는 텔레비전의 등장때문에 위기의식을 느낀 영화산업자들이 영화의 독창성을 보여주겠다며 등장시킨 비율이지만 이 영화에서는 그 자체로 아주 인상적입니다. 이런 화면이 작고 빠른 동물들에게 포커스를 둘 때 아주 효과적으로 쓰였기 때문이죠. 쓸데없는 배경 낭비없이 그들의 움직임을 충분히 포착해내고 그러면서도 표정까지 읽어낼 수 있을 정도로 크게 잡을 수도 있습니다. 이 방식은 디즈니의 다른 영화에서는 등장하지 않았습니다.

전체적으로 작은 개들이 화면의 중심에 있기 때문에 영화에 등장하는 대다수의 인간들은 상체가 잘리거나 포커스에서 벗어난 채 목소리만 나옵니다. 비중이 꽤 있는 레이디의 주인들은 얼굴 한번 제대로 보기가 힘들어요. 심지어 그들의 이름마저 Darling과 Dear로 표기될 정도로 영화는 인간에 무심합니다. 개의 관점에서 호칭을 이름이라고 착각한 게 진짜 이름처럼 나오는 겁니다. 영화의 일순위는 개이거든요.
작품의 플롯은 코스모폴리탄에 실린 Happy Dan, The Cynical Dog이란 단편에서 가져온 것입니다. 원작자 와드 그린은 작품에 참여하면서 영화 발표 한두해 전에 월트 디즈니의 권유로 작품의 소설을 발행했죠. 이야기는 상류층 집안의 애완견인 레이디와 떠돌이 잡종 트램프의 로맨틱 코미디입니다. 개를 키워본 사람이라면 나즈막히 탄성을 지를만한 소소한 에피소드들이 많습니다. 사온 날 낑낑거리고 잠을 안자는 모습이나 어리광부리는 모습의 묘사는 지극히 현실적어서 잠시 예전 생각에 가슴이 뭉클해기도 합니다. 스토리를 정리할 단계군요.

부잣집에 살면서 온갖 사랑을 받고 자란 코카스파니엘 레이디는 어느날 주인인 달링이 임신하면서 그녀에게 관심을 덜 쏟게되자 의아스럽고 속상합니다. 그렇지만 친구들인 족과 트러스티가 아기는 귀한 존재라고 말해주면서 그제서야 레이디도 아기에게 호감을 가지게 되죠. 그러던 어느날 주인부부가 아기만 놓아두고 중국으로 출장을 가면서 집에는 숙모(신데렐라의 요정대모와 성우가 동일합니다)가 찾아오고 레이디는 그녀는 물론, 그녀의 고양이들과 함께 살게됩니다. 그러나 숙모의 사악한 고양이들이 레이디에게 누명을 씌우고, 단단히 화가 난 숙모는 레이디에게 입가리개를 달아 놓으려하죠. 너무 놀란 나머지 길거리로 뛰어 나간 레이디는 이전부터 그녀에게 관심을 보이던 길거리 개 트램프의 도움으로 간신히 가리개를 벗겨냅니다. 그리고 트램프에게 푹 빠져 둘은 저녁을 함께 먹고 하룻밤을 같이 보내게 되죠. 알려진 바로는 처음으로 디즈니내에서 성적 코드가 담긴 영화라고 합니다. 50년대에는 결혼하지 않은 남녀에게 이런 성적인 암시를 미디어에서 부여하면 안되었다고 하는데 이 영화는 다루는 대상이 동물이라서 괜찮았다라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그렇다해도 이 작품이 야하고 그렇지는 않습니다.

어쨌거나 그렇게 하루를 보내고 다음날 집에 돌아가는 찰나, 레이디가 그만 개보호소 직원에게 잡혀가는 일이 생깁니다. 그리고 거기서 떠돌이 개들에게 트램프가 바람둥이였다는 사실을 알고 그녀는 크게 실망합니다. 다행히 등록번호가 담긴 목걸이 덕분에 집에 돌아오게 되었지만 그녀는 마당에 묶인 신세로 전락하고 찾아온 트램프도 외면해 버리죠. 그때 들쥐 한마리가 아기가 있는 방으로 기어올라가고 근처에 있던 트램프가 아기를 구하러 방으로 달려갑니다. 레이디도 끈을 끊고 달려가 쥐를 잡습니다. 그러나 이 둘을 발견한 숙모는 개들이 아기를 위협한다고 생각하고 트램프를 개보호소에 신고합니다. 때마침 돌아온 주인 부부에게 레이디는 죽어있는 쥐를 보여주며 사건의 진실을 밝히고 족과 트러스티의 목숨을 건 도움으로 잡혀가던 트램프를 구출해내지요. 그리고 트램프와 레이디는 함께 행복하게 살게되고 숙모는 강아지비스켓을 선물로 보내며 화해의 뜻을 밝힙니다.

이야기 자체는 전형적이지만 촌스럽지 않습니다. 로맨틱 코미디 초기 작품이기도 하지만 평범한 장면을 특별하게 만드는 연출들이 독창적이고(그 시절 관점에서) 좋습니다. 레이디와 트램프가 스파게티를 먹다 키스를 하게 되는 씬같이 영화사적으로 남겨진 명장면도 있죠. 이 영화를 몰라도 이런 국수먹다 사랑에 빠지는 장면을 모르는 사람은 아마 없겠지요. 심지어 한국의 드라마들까지 이 씬을 패러디하고 있으니깐요.
영화는 전체적으로 평온한 분위기이지만 평범하게 지나갈 법한 장면에 살짝 트릭을 둠으로써 묘한 긴장감을 유발시킵니다. 개 보호소에서 직원들이 개를 죽이는 암시를 주는게 대표적입니다. 영화 속에서 개가 죽는 장면은 나오지 않지만 개들의 대화에서 직원들이 처리곤란한 개를 죽인다는 암시를 주고 있지요. 그리고 이런 암시는 후에 트램프가 보호소에 잡혀갈 때 한층 긴장감을 더해주게 됩니다. 전체적으로 비중있는 악역이 없는 대신 위기가 닥치면 화풍이 거칠게 바꾸는 등의 변주를 통해 극에 위기와 공포, 긴장감을 부여하기도 하죠.
레이디의 친구인 트러스티가 차에 깔려 죽은 것처럼 연출하는 것도 흥미로운 장면 중 하나입니다. 지금은 빈번하게 쓰여서 진부해진 연출이긴 하지만 트러스티가 죽었다는 암시는 갑작스럽게 작품을 비극적 분위기로 바꾸며 관객들을 숙연하게 만들죠. 그러나 사실 트러스티의 죽음은 연출의 페이크에 불과하고(살아서 깁스를 한 채 돌아오죠) 해피엔딩을 더 단단하게 만들어주는 요소입니다. 그런데 원래 시놉에서는 트러스티가 마지막에 트램프를 구하면서 진짜로 죽는 역할이었다고 하더군요. 밤비의 엄마를 죽인 후로 온갖 비난에 시달린 디즈니가 주요 인물의 죽음을 빼고 이야기를 바꾸자고 제안했다고 합니다. 아무래도 트러스티가 진짜 죽었다면 이야기의 힘은 강했겠지만 지나치게 자극적이라는 평을 피해가기는 힘들었을겁니다. 관객들의 반응을 따라갈건지 이야기꾼의 고집을 지킬 건지는 그때도 진지한 고민 중 하나였습니다.

그렇게 이야기의 보편성과 연출의 실험성이 공존하는 영화입니다. 둘이 어울리며 얻어낸 작품의 전형성은 이후 많은 로맨틱 코메디들이 답습하게 되었죠. 점차 세월을 입고가기 시작한 디즈니와 그의 애니메이터들이 20년 가까이 쌓아온 영화적인 노하우를 아낌없이 이 영화에 발휘했습니다. 당시에는 혹평을 받았던 이 영화가 수십년의 세월을 거치며 명작으로 대접받게 된 것은 연출의 선구적임을 인정받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 엔딩을 주요캐릭터가 맺지않는 첫번째 디즈니 영화라고 하네요. 월-E가 두번째라고 합니다.




덧글
2009/03/15 12:10 # 답글
비공개 덧글입니다.
Myung 2009/04/12 01:42 # 답글
디즈니작중에서도 가장 좋아하는 애니메이션인데 멋지게 리뷰를 적어주셨네요.보면서 몰랐던 해석이라던가 그냥 지나친 장면들도 있구 ㅋㅋㅋㅋ
이글루 추가해갑니다 :)
닭살튀김 2009/04/15 14:22 # 답글
흥미진진한 스토리가 정말 좋았는데, 아들이 주인공인 2도 재밌게 봤죠. ㅎㅎ위키백과 번역 중에 알게된 사실이지만, 기존의 아카데미 포맷으로도 같이 개봉했다네요.
http://foldurl.com/80479